12년을 기다렸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영화 보는 내내 그 시간이 어떤 건지 계속 생각하게 됐다.
그레타 리 감독의 데뷔작인데,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했다. 노라(그레타 리)와 해성(유태오), 어릴 적 친구였던 두 사람이 서울에서 뉴욕으로, 그리고 다시 만나기까지를 그렸다. 근데 이게 단순한 재회 영화는 아니었다. 첫사랑 이야기도 아니고, 멜로도 아니다. 뭐라고 딱 정의하기 어려운 영화였다.
영화는 바에 앉아있는 세 사람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노라, 해성, 그리고 또 한 명. 주변 사람들이 저 세 명은 무슨 관계일까 추측하는 소리가 들린다. 친구들? 직장 동료? 아니면 삼각관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게 이 영화의 방식이었다.
어릴 때 노라와 해성은 단짝이었다. 서울 어딘가의 학원 앞에서 만나고, 놀이터에서 놀고, 그런 사이. 근데 노라네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갑자기. 해성은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헤어진다.
12년 후, 페이스북으로 다시 연락이 닿는다. 노라는 뉴욕에서 작가 지망생으로 살고 있고, 해성은 서울에서 엔지니어로 일한다. 둘은 스카이프로 통화하기 시작한다. 시차가 있어서 한 명은 아침이고 한 명은 밤이다. 화면 너머로 서로를 보면서 이야기한다.
이 장면들이 참 좋았다. 카메라가 한 사람의 얼굴만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상대방의 얼굴은 안 보인다. 그냥 모니터 불빛만 얼굴에 비친다. 근데 그 표정만으로도 다 알 수 있었다. 그리워하는 거, 설레는 거, 조심스러운 거.
몇 달을 그렇게 통화하다가 노라가 끊는다. "이건 아닌 것 같아." 해성은 당황한다. 근데 노라는 확고하다. 자기 삶이 있고, 지금은 그게 우선이라고. 해성은 그냥 "알겠어"라고만 한다.
그렇게 또 12년이 흐른다.
뉴욕에서 만난 두 사람
노라는 극작가가 됐다. 아서라는 남자를 만나 결혼도 했다. 해성은 여전히 서울에서 엔지니어로 산다. 결혼은 안 했다. 해성이 뉴욕 여행을 온다. 노라에게 연락한다. 둘은 24년 만에 다시 만난다.
센트럴 파크를 걷는다. 페리를 탄다. 맨해튼 거리를 걷는다. 대화는 많지 않다. "여기 처음이야?" "응." "어때?" "좋다." 이런 식이다. 근데 그 짧은 대화 사이사이에 뭔가 엄청 많은 게 오간다. 말로 안 하는 것들.
해성이 "나영이"라고 부르는 순간이 있다. 노라는 잠깐 멈칫한다. 자기를 나영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으니까. 부모님이나 옛날 친구들 정도? 노라는 이제 완전히 미국 사람이 됐다.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쓰고, 영어로 꿈꾼다. 근데 해성 앞에서는 여전히 나영이다. 12살 때 그 나영이.
그게 편한 건지 불편한 건지 모르겠다. 노라의 표정이 계속 바뀐다. 웃다가도 금방 심각해지고, 심각하다가도 또 웃는다.
바에서 세 명이 만난다. 노라, 해성, 아서. 아서는 처음엔 편하게 이야기하려고 한다. "해성 씨는 뭐 하세요?" "엔지니어요." "아, 그렇구나." 근데 점점 말이 없어진다. 그냥 와인만 마신다. 노라와 해성이 한국어로 이야기할 때 아서는 그걸 듣고만 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른다.
아서의 표정이 계속 신경 쓰였다. 불안해 보이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자기 아내와 옛날 친구가 24년 만에 만나서 한국어로 웃고 떠드는 걸 보면서, 뭘 느꼈을까. 질투? 불안? 아니면 그냥 외로움?
영화는 아서를 나쁘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굉장히 괜찮은 사람으로 그린다. 노라를 사랑하고, 노라의 선택을 존중한다.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은 불편하다. 그게 현실이다.
인연이라는 말
노라가 아서에게 "인연"을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에서는 전생에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 이생에서 다시 만난다고 믿는다는 거. 아서가 묻는다. "그럼 우리도 인연이야?" 노라가 웃으면서 말한다. "당연하지."
근데 그 말을 하는 노라의 표정이 복잡하다. 정말 그렇게 믿는 건지, 아니면 그냥 아서를 안심시키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해성과의 인연은 뭘까? 전생? 아니면 그냥 우연?
해성은 인연을 믿는 것처럼 보인다. 노라를 24년 만에 다시 만난 것도, 여전히 노라를 좋아하는 것도, 다 인연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근데 노라는 그렇지 않다. 노라는 선택을 믿는다. 미국에 온 것도, 작가가 된 것도, 아서를 만난 것도 다 자기가 선택한 거다.
둘의 차이가 거기에 있다. 해성은 운명을 믿고, 노라는 선택을 믿는다.
마지막 날 밤, 노라가 해성을 택시에 태운다. 택시가 떠나기 전에 잠깐 포옹한다. 오래. 아무 말도 없이. 그리고 해성이 떠난다.
노라는 혼자 걸어간다. 카메라는 그 뒷모습을 한참 따라간다. 노라가 걷다가 멈춘다. 울고 있다. 아서가 나와서 노라를 안는다. 노라가 아서 품에서 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뭔가 이해했다. 노라는 옳은 선택을 했다. 아서를 선택한 게 맞다. 여기 뉴욕에서 작가로 사는 게 맞다. 근데 그게 아프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해성을 보내는 게 슬프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선택한다는 건 뭔가를 포기한다는 뜻이니까.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노라가 잘한 건지, 해성이 불쌍한 건지, 아서는 괜찮은 건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냥 이 세 사람의 하루를 보여줄 뿐이다.
근데 그게 더 현실적이었다. 삶은 원래 그런 거니까. 명확한 답이 없고, 선택은 항상 아프고, 그래도 살아가는 거.
뉴욕의 밤 풍경이 계속 나온다. 불빛들, 거리들, 사람들. 그 속에서 노라는 살아간다. 해성 없이. 근데 해성을 기억하면서.
영화 보고 나서 한참 멍했다. 뭔가 가슴이 먹먹했다. 슬픈 영화는 아닌데 슬펐다. 로맨틱한 영화도 아닌데 가슴이 아팠다.
12년이라는 시간이 뭔지, 선택한다는 게 뭔지, 포기한다는 게 뭔지, 그런 것들을 계속 생각하게 됐다.
이 영화는 오래 남을 것 같다. 해성의 표정도, 노라의 뒷모습도, 아서의 침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