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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애를 기억하는 이들을 위한 영화 <비포 미드나잇>

by lazypenguinclub 2025.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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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미드나잇

사랑이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변하는지 궁금했다. 밤새 걸으면서 느꼈던 그 설렘이, 일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남는지.

이 영화가 그 답을 준다. 조용하지만 깊게.

비포 3부작의 마지막이다. 제시와 셀린느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났다. 첫 영화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두 번째에서 다시 만나 끝내지 못한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이제, 부부가 됐다. 아이 둘을 키우며 산다.

배경은 그리스다. 한적한 시골 마을. 햇살은 따사롭고, 바다는 조용하다. 풍경은 아름답다. 근데 대화는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다.

삶이 달라졌다. 감정은 단단해졌고, 관계는 복잡해졌다. 파리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 설렘은 이제 일상 속 어딘가에 묻혀있다.

영화는 제시와 셀린느의 하루를 따라간다. 공항, 차 안, 점심 식사, 산책, 호텔방. 큰 사건은 없다. 그냥 말이 오가고, 감정이 드러나고, 서로를 마주한다.

근데 그 안에 오랜 관계에서만 나올 수 있는 감정들이 다 들어있다.

차 안 대화 장면이 길다. 정말 길다. 10분 넘게 이어진다. 제시가 운전하고, 셀린느가 옆에 앉아있다. 처음엔 가벼운 이야기다. 아이들, 날씨, 그리스 풍경.

근데 점점 달라진다. 제시가 아들 이야기를 꺼낸다. 미국에 있는 전처와의 아들. 자주 못 본다는 게 힘들다고. 셀린느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표정이 복잡하다.

"같이 살면 어때?"

제시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미국으로 가자고. 아들 가까이에서 살자고.

셀린느가 굳는다. "내 일은? 내 삶은?"

여기서부터 공기가 바뀐다.

점심 식사 장면도 좋다. 친구들이랑 같이 먹는다. 나이 든 작가 부부, 젊은 커플. 다들 사랑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이 든 작가가 말한다. 아내가 죽었다고. 60년을 함께 살았는데 이제 혼자라고. 그 세월이 어땠냐고 물으니까 웃으면서 대답한다. "힘들었지. 근데 좋았어."

제시와 셀린느가 그 말을 듣는다.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호텔방의 전쟁

저녁에 친구들이 호텔방을 선물한다. 둘만의 시간을 가지라고. 로맨틱한 제스처다.

근데... 로맨틱하지 않다.

걸어가면서 제시가 농담한다. 셀린느는 웃지 않는다. 호텔에 도착해서도 분위기가 이상하다.

제시가 분위기를 띄우려고 한다. "예전처럼 해볼까?" 셀린느는 시큰둥하다. "예전이 언제?"

말싸움이 시작된다. 처음엔 작은 거다. 말투, 태도, 그런 것들. 근데 점점 커진다.

셀린느가 쌓아뒀던 말들을 쏟아낸다. 제시는 항상 자기 아들만 생각한다고. 자기 커리어는 중요하지 않냐고. 왜 자기만 희생해야 하냐고.

제시는 당황한다. 반박한다. "난 널 위해 파리에 왔잖아. 내 삶도 다 바꿨어."

"내가 원했어? 네가 선택한 거잖아."

이 대화가 진짜였다. 과장 없이, 꾸밈 없이. 오래된 커플이 하는 그 말들. 표면적으로는 작은 문제 같지만 속에는 몇 년치 서운함이 쌓여있는.

셀린느가 운다. 화도 나고 슬프기도 하고. "더 이상 널 사랑하는지 모르겠어."

이 말이 제일 아팠다. 사랑이 끝났다는 게 아니라, 모르겠다는 거. 그게 더 무섭다.

제시는 아무 말 못 한다. 그냥 앉아있다.

셀린느가 나가버린다. 호텔방을 박차고 나간다. 밤거리를 걷는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제시가 따라간다. 카페에 앉아있는 셀린느를 찾는다. 옆에 앉는다.

침묵.

제시가 말을 시작한다. 장난처럼. "타임머신 이야기 기억해?"

첫 영화에서 했던 그 이야기. 미래에서 온 자기가 지금 여기 앉아있다고. 네가 지금 떠나면 평생 후회할 거라고 말하러 왔다고.

셀린느가 처음엔 안 웃는다. 근데 제시가 계속 말한다. 진지하게, 또 우스꽝스럽게.

"난 41살 제시야. 미래에서 왔어. 너한테 말하러 왔어. 지금 떠나지 마. 이 남자 별론 것 같지만, 그래도 너 사랑해."

셀린느가 웃는다. 조금. 아주 조금.

"별론 건 맞네."

"응, 맞아."

둘이 웃는다. 피곤하게, 지쳐서. 근데 웃는다.

카메라가 멀어진다. 둘이 앉아서 이야기하는 모습. 그리스 밤바다가 보인다. 별이 떠있다.

영화가 끝난다.

해결된 게 뭐가 있나? 제시의 아들 문제? 안 풀렸다. 셀린느의 커리어 고민? 그대로다. 둘의 갈등? 여전하다.

근데 함께 있다. 그게 답이다.

사랑이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변하냐고? 이렇게 변한다. 설레지 않는다. 힘들다. 짜증난다. 근데... 떠나지 않는다. 계속 이야기한다.

영화는 사랑을 미화하지 않는다. 예쁘게 포장하지도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지저분하고, 복잡하고, 때로는 추한 모습까지.

근데 그게 진짜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연기가 미쳤다. 20년 가까이 이 캐릭터를 연기했다. 1995년 첫 영화부터 2013년 이 영화까지. 실제로도 나이 들었고, 캐릭터도 나이 들었다.

그래서 더 리얼하다. 연기가 아니라 진짜 제시와 셀린느를 보는 것 같다.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대화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비포> 시리즈 전체가 그렇다. 액션 없고, 사건 없고. 그냥 두 사람이 걷고, 앉고, 이야기한다.

근데 지루하지 않다. 대화가 살아있으니까. 진짜 사람들이 하는 말 같으니까.

이 영화는 오래된 연인들을 위한 영화다. 아니, 누군가와 함께 살아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사랑이 항상 아름다울 순 없다는 것. 때로는 싸우고, 상처주고, 후회한다는 것. 근데 그래도 함께 있다는 것.

그게 사랑이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만났던 그 젊은 둘이 이제 중년이 됐다. 설렘은 사라졌지만 대신 무게가 생겼다. 가볍지 않지만 깊다.

영화를 보고 나니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게 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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