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2019년에 개봉했다. 조남주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김도영 감독 작품이고, 정유미가 주연을 맡았다.
개봉 전부터 논란이 많았다. 페미니즘 영화라고, 남성 혐오라고. 근데 막상 보면 그냥 한 여자의 이야기다.
김지영(정유미)은 1982년생이다. 평범한 여자. 대학 나오고, 회사 다니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
근데 어느 날부터 이상해진다. 다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엄마처럼, 언니처럼, 친구처럼. 본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된다.
남편 대현(공유)이 걱정한다. 병원에 간다.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
영화는 김지영의 과거를 보여준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초등학교 때. 오빠는 고기 많이 먹고, 지영이는 적게 먹는다. 할머니가 말한다. "아들은 많이 먹어야지." 지영이는 묻는다. "저는요?" "너는 여자니까."
중학교 때. 남자애가 따라온다. 무섭다. 선생님한테 말한다. 선생님이 묻는다. "네가 먼저 관심 준 거 아니야?" 지영이 잘못이 된다.
고등학교 때. 언니가 대학 가고 싶어한다. 근데 집안 형편이 안 된다. 아버지가 말한다. "오빠 대학 보내야지. 너는 나중에." 언니는 포기한다.
대학 때. 알바한다. 남자 손님이 번호 달라고 한다. 거절한다. 화낸다. "왜 이래? 그냥 친하게 지내자는 건데."
회사 다닐 때. 일 잘한다. 근데 승진은 남자 동기가 한다. "김 대리는 곧 결혼할 거 아니야?" 실력이 아니라 성별로 판단한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회사 그만둔다. 육아에 전념한다. 집에만 있다. 아이랑.
공원에서 커피 마신다. 남자가 지나가면서 말한다. "맘충들이 또 모여서 놀고 있네. 남편 돈으로." 지영이는 아무 말 못 한다.
이런 장면들이 계속 쌓인다. 하나하나는 작다. 근데 모이면 무겁다.
정유미의 연기
정유미가 김지영을 잘 표현했다. 화려하지 않다. 조용하다. 참는다. 웃는다. 괜찮은 척한다.
근데 그 표정 뒤에 뭔가 있다. 지쳐있다. 슬프다. 화난다. 근데 표현 안 한다. 못 한다.
다른 사람으로 변할 때가 있다. 엄마가 된다. 말투가 바뀐다. "내 새끼가 뭘 잘못했어!" 평소 지영이가 절대 안 할 말. 근데 엄마 빙의하면 한다.
언니가 된다. "나는 대학도 못 갔어. 오빠 때문에." 지영이의 한이 아니라 언니의 한.
친구가 된다. 회사 그만두고 결혼한 친구. "나도 일하고 싶은데. 근데 애가 있으니까."
지영이는 자기 말을 못 한다. 다른 사람 목소리를 빌려서 말한다. 그게 병이 된 거다.
공유도 좋았다. 남편 대현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지영이를 사랑한다. 근데... 이해 못 한다. 처음엔.
"내가 뭘 잘못했어? 나도 회사 다녀. 힘들어. 너만 힘든 거 아니야."
이 대사가 전형적이다. 틀린 말은 아닌데... 뭔가 어긋난다.
대현은 점점 깨닫는다. 지영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자기도 모르게 지영이한테 상처 줬다는 걸.
논란이 많았다. 남성 혐오 영화라고. 근데 영화에 남자를 혐오하는 장면은 없다.
그냥 현실을 보여줄 뿐이다. 김지영이 겪은 일들. 많은 여자들이 겪는 일들.
물론 모든 여자가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근데 적지 않은 여자들이 공감했다. "이게 나 이야기 같아." 그래서 논란이 된 거다.
남자들 중에도 공감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 엄마가 이렇게 살았구나." "우리 아내도 힘들겠구나."
근데 반발한 사람도 많았다. "남자도 힘들어." "요즘 여자가 더 편해." 이런 반응들.
영화는 남자를 악당으로 그리지 않는다. 아버지도, 남편도, 오빠도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냥... 모른다. 생각 안 해본 거다.
시스템이 문제다. 여자라서 손해 보는 구조. 무의식적인 차별.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불평등.
영화는 그걸 보여준다. 조용히. 과하지 않게.
느린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느리다. 액션도 없고, 반전도 없다. 그냥 일상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한테는 지루할 수 있다. "뭐가 일어나? 왜 이렇게 답답해?"
근데 그게 포인트다. 지영이의 삶이 답답하니까. 영화도 답답하다.
카메라가 지영이를 따라간다. 집에서, 공원에서, 마트에서. 특별한 일은 안 일어난다. 아이 재우고, 밥하고, 청소하고.
근데 그 반복이 무겁다. 매일 똑같은 일. 끝이 없다. 쉬는 시간도 없다.
한 장면이 기억난다. 지영이가 화장실에 간다.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 문 닫고 앉아있다. 한숨 쉰다. 그게 휴식이다.
많은 엄마들이 공감했다고 한다. "화장실이 유일한 쉬는 곳이에요." 슬픈 이야기다.
영화에 음악도 별로 없다. 조용하다. 일상 소리만 들린다. 아이 우는 소리, 설거지 소리, TV 소리.
그게 더 현실적이다. 삶에는 BGM이 없으니까.
영화 끝에 지영이는 나아진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상담을 받고, 남편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대현이 말한다. "내가 반차 써서 아이 봐줄게. 너 하고 싶은 거 해." 작은 변화다. 근데 지영이한테는 큰 의미다.
지영이가 웃는다. 진짜 웃음. 괜찮은 척이 아니라.
희망적인 결말이다. 근데 완벽한 해피엔딩은 아니다. 문제가 다 해결된 건 아니니까. 그냥 조금 나아진 거다.
그게 현실적이다. 인생이 한 번에 바뀌진 않는다. 조금씩 나아진다.
영화는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이게 정답이야!"라고 안 한다. 그냥 보여준다. "이런 삶도 있어." 판단은 관객 몫이다.
나는 이 영화가 좋았다. 조용하지만 강했다. 과장 없이 담담했다. 근데 그래서 더 무겁게 다가왔다.
물론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느리고, 답답하고. 재미를 찾는 사람한테는 안 맞을 수 있다.
근데 생각할 거리를 준다. 내 주변 여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엄마는? 아내는? 여자친구는? 여동생은?
모르고 있었던 것들을 알게 된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82년생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70년생도, 90년생도, 2000년생도. 세대를 넘어서 많은 여자들이 겪는 일들.
그리고 이건 여자만의 문제도 아니다. 남자도 이 구조 안에 있다. 남자도 "남자니까"라는 압박을 받는다. "강해야지." "울면 안 돼." "가장이니까."
결국 성별 고정관념이 모두를 옭아맨다.
영화 보고 나서 생각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았나? 무심코 한 말, 당연하게 여긴 것들.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82년생 김지영>은 조용한 영화다. 근데 여운은 크다. 개봉한 지 몇 년 지났는데도 여전히 이야기된다. 그게 이 영화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