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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탈리스트: 콘크리트보다 단단한 것들

by lazypenguinclub 2025.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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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의 잔해 위에서, 인간을 짓는 사람

〈브루탈리스트〉를 봤다. 첫 장면부터 뭔가... 눌렸다.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 잿빛 하늘, 그 속에 혼자 서 있는 남자. 건축가 라즐로(에이드리언 브로디). 이 사람은 그냥 건물 짓는 게 아니었다. 전쟁으로 다 무너진 세계 위에, 다시 '살아갈 이유'를 세우고 있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 미국에 와서 꿈꾸는 건 거창한 성공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근데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냉정했다.

영화는 거기서 시작한다. 이상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서.

처음엔 좀 지루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보다 보니까 묘하게 마음이 뜨거워졌다. 라즐로가 콘크리트 블록을 하나씩 쌓을 때마다, 그 사람 마음에 생긴 균열도 같이 쌓이는 것 같았다. 벽을 쌓으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가두는 느낌? 그 답답함이 계속 따라왔다.

이 영화는 대사가 별로 없다. 대신 벽이 말하고, 그림자가 말하고, 빈 공간이 말한다.

카메라가 라즐로를 따라서 천천히 움직이는데,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콘크리트가 차가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사람 체온 같은 게 느껴졌다.

제일 좋았던 장면. 라즐로가 막 완성한 건물 한가운데 서서 천장을 올려다본다. 말은 안 하는데 주변 벽들이 대신 숨 쉬는 것 같았다.

카메라가 엄청 오래, 거의 멈춘 것처럼 그를 비춘다. 천장 틈 사이로 빛 한 줄기가 들어와서 그의 얼굴을 스친다.

그때 알았다. 이 사람은 신을 안 믿는구나. 대신 '짓는 것' 자체를 믿는구나. 건축이 그에게는 기도고, 건물이 신앙이었다.

그 장면에서 눈물 날 뻔했다. 콘크리트 덩어리가 이렇게까지 따뜻할 수 있다니.

예술이 돈을 만나면

근데 라즐로의 진짜 적은 전쟁이 아니었다. 바로 앞에 있는 자본가, 해리슨(가이 피어스).

이 사람이 라즐로의 재능을 이용하려고 든다.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해버린다. 둘의 관계가 진짜 묘했다. 신과 인간? 창조자와 파괴자? 뭐 그런 느낌이다.

라즐로는 알고 있다. 자기가 피땀 흘려 지은 건물이 결국엔 해리슨 이름으로 불릴 거라는 걸. 그래도 멈출 수가 없다.

신념이 흔들린다. 근데 그 흔들림 자체가 너무 인간적이다.

이게 너무 현실 같았다. 예술 하는 사람들 다 이러지 않나. 이상은 있는데 현실이 발목 잡고, 지키려고 하면 스스로가 무너지고. 라즐로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버티는 모습. 그게 진짜 품격이다.

에이드리언 브로디. 이 사람 얼굴이 건물보다 더 강렬했다.

눈빛 하나로 모든 설계도를 대신하고, 주름 하나하나에 시대가 새겨져 있었다. 화날 때도 조용하다. 근데 그 조용함이 무섭다. 폭발 직전 같은 느낌.

벽 바라보는 장면들... 그게 사람의 한계를 보는 눈빛 같았다.

영화 끝나고도 계속 얼굴이 떠올랐다.

"당신은 지금 삶을 짓고 있나요, 아니면 그냥 버티고만 있나요?"

말은 안 하는데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미완성이 완성이다

〈브루탈리스트〉는 건축 영화가 아니다. 사람 이야기다.

다 무너진 세상에서도 뭔가를 계속 세우려는 사람. 그게 얼마나 아프고, 동시에 아름다운 일인지.

라즐로의 건물은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 근데 나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미완성 그 자체가 가장 인간다운 완성 아닐까.

영화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주변을 유심히 봤다. 벽, 창문, 바닥.

우리 다 비슷한 거 아닐까. 매일 무너지고, 다시 세우고, 또 흔들리면서도... 계속 뭔가를 만들려고 한다.

우리 모두 각자의 브루탈리스트인거다.

이 영화 화려하지 않다. 거칠다. 때로는 속 답답하다. 고구마 세 개 먹은 것처럼 목 메인다.

근데 그 안에 뭔가 단단한 게 있다.

"나는 아직 만들고 있다"

그 믿음.

영화관 나올 때 한참 동안 멍했다.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뭔가... 맞았다. 맞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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