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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왕이 된 남자 - 진짜보다 더 뜨거웠던 가짜

by lazypenguinclub 2025.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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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왕이 된 남자

2012년에 개봉했다. 사극인데 사극 같지 않았다.

"만약 왕 대신 평범한 사람이 그 자리에 앉는다면?" 이 질문 하나로 시작하는 영화다.

추창민 감독 작품이고, 이병헌이 주연을 맡았다. 1인 2역이다. 광해군과 광대 하선. 똑같이 생긴 두 사람.

광해군은 두렵다. 암살 위협에 시달린다. 신하들도 믿을 수 없다.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잔다.

그러다 자기랑 똑같이 생긴 광대를 발견한다. 하선이라는 이름의 떠돌이 광대. 얼굴만 같은 게 아니라 목소리까지 비슷하다.

광해군이 결정한다. "너, 나 대신 왕 노릇 해봐."

하선은 당황한다. 당연하다. 어제까지 광대였는데 오늘 갑자기 왕이라니.

근데 해야 한다. 거절하면 죽는다.

처음엔 엉망이다. 왕의 말투를 모른다. 예법도 모른다. 신하들 이름도 헷갈린다. 도승지(류승룡)가 옆에서 계속 귀띔해준다. "저분은 영의정이십니다." "예, 하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코믹하다. 하선이 실수할 때마다 웃긴다. 근데 점점 달라진다.

하선이 백성들을 본다. 진짜로 본다. 왕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 굶주린 백성, 억울한 백성, 아픈 백성.

광해군은 안 봤던 것들이다. 아니,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

하선은 다르다. 자기도 백성이었으니까. 그들의 고통을 안다.

어느 날 기근 지역 백성들이 궁궐 앞에서 호소한다. "먹을 게 없습니다." 신하들은 쫓아내려고 한다. 하선이 말한다. "창고를 열어라. 곡식을 나눠줘라."

신하들이 반대한다. "전하, 국고가 비어있습니다." 하선이 답한다. "백성이 굶어 죽는데 국고가 무슨 소용이냐."

이 장면이 좋았다. 권력자의 논리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으로 결정하는 거.

이병헌의 1인 2역

이병헌 연기가 미쳤다. 진짜로.

광해군과 하선이 완전히 다르다. 같은 얼굴인데 다른 사람이다.

광해군은 차갑다. 눈빛이 날카롭고, 말투가 경직돼있고, 걸음걸이가 무겁다. 항상 경계한다. 누구도 믿지 않는다.

하선은 따뜻하다. 눈빛이 맑고, 말투가 부드럽고, 움직임이 자연스럽다. 사람들을 편하게 대한다.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데 구분이 된다. 대단하다.

특히 두 사람이 같이 나오는 장면. 광해군이 거울처럼 하선 앞에 선다. 똑같은 얼굴, 완전히 다른 표정. 한 명은 왕이고, 한 명은 광대인데... 누가 진짜 왕처럼 보이는지 헷갈린다.

중전(한효주)도 눈치챈다. 왕이 달라졌다는 걸. 예전엔 자기를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말을 건다. 걱정도 한다.

처음엔 의심한다. "당신 누구세요?" 근데 점점 하선을 받아들인다. 아니, 이 사람이 진짜 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둘 사이에 감정이 생긴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짧은 시간이지만... 뭔가 통한다. 서로를 이해한다.

도승지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하선을 감시한다. 실수하면 바로 죽일 태세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뀐다. '이 사람이 진짜 왕이면 좋겠다.'

류승룡이 도승지를 잘 표현했다. 충직한 신하지만 유연한 사람. 원칙을 지키되 사람을 본다.

하선과 도승지가 주고받는 대화들이 재밌다. 진지한데 웃기고, 웃긴데 진지하다.

"전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왜? 내가 왕인데?"
"...그러시니까 문제입니다."

이런 식이다. 코미디 같은데 그 안에 진심이 있다.

영화의 핵심 질문이다. 왕의 자격은 어디서 오는가?

혈통? 광해군은 정통 왕이다. 근데 백성을 안 본다.

하선은 광대다. 근데 왕처럼 행동한다. 백성을 위해 결정하고, 신하들 말을 듣고, 정의롭게 판단한다.

p>그럼 누가 진짜 왕인가?

영화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왕은 자리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혈통이 아니라 책임이라고.

하선이 백성 앞에 나선다. 직접. 왕이 백성 앞에 나서는 건 드문 일이다. 신하들이 말린다. 위험하다고.

하선이 말한다. "내가 왕이면 백성을 봐야지. 멀리서만 보면 뭐가 보이냐."

그리고 간다. 백성들 사이로. 그들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듣는다.

백성들이 운다. 처음이다. 왕이 이렇게 가까이 온 게.

이 장면에서 나도 울컥했다. 과장 없이 담담하게 그렸는데, 그래서 더 감동적이었다.

사극이지만 가볍다

<광해>는 무겁지 않다. 사극인데 보기 편하다.

웃긴 장면이 많다. 하선이 왕 노릇 배우면서 실수하는 것들. 궁궐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 도승지가 혼내는 장면.

근데 웃다가도 금방 진지해진다. 정치적 음모, 암살 시도, 권력 다툼. 긴장감이 계속 유지된다.

이 균형이 좋았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다.

특히 하선과 내시들의 관계가 재밌다. 처음엔 서먹한데 점점 친해진다. 하선이 내시들한테 농담도 하고, 같이 웃기도 한다.

"야, 나 좀 도와줘."
"...전하, 야 라고 하시면..."
"아, 미안. 습관이."

왕이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하선은 광대 출신이니까 자꾸 실수한다. 근데 그게 오히려 인간적이다.

시간이 흐른다. 하선은 점점 왕다워진다. 말투, 태도, 결정. 모든 게 왕 같다.

근데 진짜 광해군이 돌아올 시간이 다가온다.

하선은 안다. 자기가 계속 왕일 순 없다는 걸. 이건 빌린 시간이다.

마지막이 다가온다. 하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만들고, 억울한 사람들을 풀어주고.

광해군이 돌아온다. 하선을 본다. 자기 자리를 너무 잘 지킨 걸 보고... 복잡한 표정이다.

질투? 감사? 부끄러움? 다 섞여있다.

하선이 떠난다. 다시 광대로. 궁궐을 나가면서 뒤를 돌아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왕이었던 그 시간.

중전이 본다. 멀어지는 하선을. 눈물이 난다.

도승지도 본다. 아무 말 안 한다. 그냥 절한다. 깊게.

영화가 끝난다. 하선의 뒷모습으로.

2012년 영화지만 지금 봐도 좋다. 아니, 지금 보면 더 와닿는다.

진짜 리더는 누구인가. 자리에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책임지는 사람인가.

백성을 보는 왕. 권력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 우리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 아닌가.

이병헌이 이 역할로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당연하다. 이 정도 연기면.

추창민 감독도 잘했다. 사극을 이렇게 재밌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천만 관객을 넘겼다고 한다. 이해된다. 재밌고, 감동적이고, 생각할 거리도 있으니까.

<광해>는 단순한 오락 영화가 아니다. 메시지가 있다. 근데 그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영화 보고 나서 생각했다. 내가 만약 저 자리에 있다면? 권력을 쥐면 어떻게 행동할까?

하선처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광해군처럼 두려움에 갇힐까?

답은 모르겠다. 근데 질문은 남는다.

그게 좋은 영화다. 끝나고도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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