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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감정을 잊은 이들을 위한 영화 <비포 선셋>

by lazypenguinclub 2025.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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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셋

9년이 지났다. 제시와 셀린느가 다시 만난다. 이번엔 파리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두 번째 비포 시리즈다. 전작 비포 선라이즈에서 비엔나 기차역에서 헤어진 두 사람이, 9년 만에 파리 서점에서 마주친다.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모르겠다.

제시는 작가가 됐다.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그 책이 바로 9년 전 셀린느와의 하룻밤 이야기다. 파리 서점에서 북토크를 하는데, 셀린느가 온다.

둘은 눈이 마주친다. 그 순간의 표정이 다 말한다.

영화는 거의 실시간으로 흐른다. 8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두 사람이 파리를 걷는다. 그게 전부다.

큰 사건? 없다. 액션? 없다. 그냥 걷고, 이야기하고, 카페에 앉고, 또 걷는다.

근데 지루하지 않다. 전혀.

북토크가 끝나고 제시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 공항 가는 차가 한 시간 반 후에 온다. 셀린느가 말한다. "같이 걸을래?"

그렇게 시작된다.

처음엔 반갑다. "어떻게 지냈어?" "뭐 하고 살아?" 이런 이야기들. 근데 점점 깊어진다. 9년 동안 각자 살아온 이야기, 후회, 그리움, 원망.

파리 거리를 걸으면서 이야기한다. 센 강변, 좁은 골목, 작은 공원. 카메라가 두 사람을 따라간다. 롱테이크로. 편집을 최소화했다. 그래서 더 현장감이 있다. 진짜 옆에서 걷는 느낌.

햇살이 좋다. 파리의 오후.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 그 빛 속에서 두 사람이 걷는다. 풍경이 아름답다. 근데 그게 배경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그 공간이 둘의 감정을 담는다.

제시는 결혼했다. 아들도 있다. 근데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말은 안 하지만 표정으로 안다.

셀린느는 환경운동가로 일한다. 남자친구도 있다. 뉴욕으로 같이 갈 계획이라고 한다. 근데 확신이 없어 보인다.

둘 다 나름대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근데 뭔가 빠져있다.

"그날 약속 장소에 갔어?"

제시가 묻는다. 9년 전, 6개월 후 비엔나 기차역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던 그 약속.

셀린느가 말한다. "못 갔어.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제시는 갔다. 기다렸다. 안 왔다.

이 대화가 아팠다. 둘 다 후회한다. 그때 만났으면 어땠을까.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까.

카페에 앉는다. 와인을 마신다. 대화가 계속된다.

셀린느가 말한다. "네 책 읽었어. 나 이야기잖아." 제시가 웃는다. "소설이야." "거짓말."

셀린느가 화난다. 진짜 화난 건지, 장난인지 애매하다. "왜 내 이야기를 써? 허락도 안 받고."

제시가 말한다. "미안해. 근데... 쓸 수밖에 없었어. 계속 생각났거든."

분위기가 무겁다. 셀린느가 눈물을 글썽인다. "나도 그래. 자주 생각했어."

솔직해지는 순간

센 강 유람선을 탄다. 관광객들 사이에 앉아서 계속 이야기한다.

제시가 고백한다. "사실 그날 밤이 내 인생 최고의 밤이었어. 그 후로는... 그런 적이 없었어."

셀린느도 말한다. "나도. 그 이후로 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한 적이 없는 것 같아."

이 대사들이 조용히 박힌다. 과장 없이, 담담하게. 근데 그래서 더 무겁다.

제시의 결혼 생활이 불행하다는 게 점점 드러난다. 아내랑 안 맞는다.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 그냥 해야 할 것 같아서 한 거다.

셀린느의 남자친구도 마찬가지다. 좋은 사람이긴 한데... 뭔가 부족하다.

둘 다 안다. 서로가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다는 걸.

근데 어떻게? 제시는 결혼했고 아들이 있다. 셀린느는 뉴욕으로 갈 계획이다. 현실이 복잡하다.

그래도 계속 걷는다. 시간은 가고, 공항 가는 차가 기다린다. 근데 제시는 서두르지 않는다.

결국 셀린느의 아파트에 간다. "차 한잔 할래?"

좁은 아파트다. 파리 특유의 오래된 건물. 창문으로 저녁 햇살이 들어온다.

제시가 시간을 확인한다. 비행기 놓칠 것 같다. 셀린느가 말한다. "그럼 내일 가면 되잖아."

제시가 웃는다. "그럴 수 없어. 아들이 기다려."

"그래."

침묵.

셀린느가 기타를 꺼낸다. 노래를 부른다. 직접 만든 곡이라고. "A Waltz for a Night"라는 제목.

가사가 둘의 이야기다. 9년 전 그날 밤에 대한 노래.

제시가 가만히 듣는다. 표정이 계속 변한다. 웃다가 슬퍼 보이다가.

노래가 끝난다.

제시가 말한다. "가야 해." 근데 일어나지 않는다.

셀린느가 말한다. "너 비행기 놓칠 거야."

제시가 웃는다. "알아."

영화가 끝난다. 제시가 소파에 앉아서 미소 짓는 모습으로.

열린 결말

둘이 어떻게 됐을까? 제시는 비행기 놓쳤을까? 셀린느랑 같이 있기로 했을까.

영화는 말해주지 않는다. 근데 그게 좋다.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그 순간이니까. 두 사람이 다시 만나서, 진심을 나누고, 서로를 확인한 그 시간.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연기가 미쳤다. 9년이 정말 지난 것처럼 보인다. 좀 더 성숙해지고, 지쳤고, 현실적이 됐다.

근데 여전히 서로를 볼 때는 그때 그 눈빛이다. 9년 전 비엔나에서 처음 봤을 때 그 설렘이 아직 남아있다.

대사가 전부인 영화다. 액션도 없고, 음악도 거의 없고. 그냥 두 사람이 말한다. 근데 그 말들이 살아있다. 각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진짜 대화 같다.

실제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링클레이터 감독과 함께 대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더 자연스러운 거다.

파리가 예쁘다. 관광지가 아니라 실제 파리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걷는다. 좁은 골목, 작은 카페, 오래된 건물. 그 풍경이 영화의 일부가 된다.

80분이 짧게 느껴진다. 더 보고 싶다. 둘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비포 선라이즈보다 좋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도 좋았지만, 이건 더 깊다. 9년이라는 시간이 쌓인 감정이 있으니까.

젊었을 때의 설렘과 중년의 후회가 섞인 느낌. 달콤하면서도 씁쓸하다.

사랑이 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함께 있는 게 사랑일까, 아니면 서로를 생각하는 게 사랑일까. 9년 동안 못 만났지만 계속 생각했다면, 그게 사랑 아닐까.

답은 없다. 근데 질문이 남는다.

영화 보고 나서 한참 앉아있었다. 엔딩 크레딧 다 올라갈 때까지.

제시가 비행기를 놓쳤을까, 계속 궁금했다.

아마 놓쳤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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