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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 사랑스런 B급은 이런 것

by lazypenguinclub 2025.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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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이 영화 뭐지 싶었다. 시작부터 정신없다. 세탁소, 세무조사, 그리고 갑자기 멀티버스. 근데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됐다.

대니얼 콴, 대니얼 셰터 감독의 작품인데, A24 특유의 그 미친 감성이 여기 다 들어있다. 에블린(양자경)이라는 평범한 중년 여성이 어느 날 갑자기 멀티버스를 넘나들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근데 이게 단순한 히어로물이 아니다. 가족 드라마고, 코미디고, 액션이고, 뭐 다 섞여있다.

처음엔 혼란스러웠다. 장면이 계속 바뀐다. 에블린은 세탁소 사장님이었다가, 액션 스타였다가, 요리사였다가, 심지어 돌멩이였다가, 도대체 뭘 보여주려는 건지 모르겠더라. 근데 30분쯤 지나니까 이해가 됐다. 아, 이게 포인트구나.

에블린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아니, 평범보다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 세탁소는 망해가고, 남편 웨이먼드(키 호이 콴)와의 관계는 차갑고, 딸 조이(스테파니 수)와는 대화가 안 된다. 세무조사는 코앞이고, 장인어른(제임스 홍)은 계속 잔소리하고.

그런 에블린이 갑자기 멀티버스의 영웅이 된다. 다른 우주의 에블린들이 살았던 삶의 기술들을 다 쓸 수 있게 된다. 쿵푸도 하고, 노래도 하고,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근데 영화를 보다 보면 알게 된다. 그 모든 능력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에블린이 정말 원하는 건 그냥 가족이었다. 딸이 자기를 봐주는 것, 남편이 자기를 이해해주는 것.

조이가 빌런으로 나온다. 조부(Jobu Tupaki)라는 이름으로. 모든 우주를 동시에 경험하면서 미쳐버린 존재. 세상의 모든 게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존재. 베이글 모양의 블랙홀을 만들어서 모든 걸 끝내려고 한다.

근데 그 조부가 사실은 그냥 조이였다. 엄마한테 인정받고 싶었던 딸. 자기를 있는 그대로 봐주길 원했던 딸. 에블린은 그걸 너무 늦게 깨닫는다.

모든 게 의미 없을 때

영화 중반쯤, 에블린도 조이처럼 모든 우주를 동시에 경험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구나. 어떤 우주에서건 결국 다 똑같구나.

여기서 영화가 허무주의로 빠질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에블린은 다르게 선택한다. "의미가 없어도 괜찮아. 그래도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할 수 있어."

이 대사가 진짜 좋았다. 거창한 철학이 아니다. 그냥 단순한 말. 근데 그게 이 영화의 전부였다.

핫도그 손가락 우주라는 게 나온다. 모든 사람의 손가락이 핫도그인 우주. 완전 황당하다. 근데 그 우주에서 에블린과 웨이먼드는 서로 사랑한다. 말도 못 하고, 손가락이 핫도그인데도 서로를 이해한다.

그 장면 보면서 웃다가 울었다. 이게 뭐라고... 싶으면서도 뭔가 울컥했다.

영화는 계속 이런 식이다. 웃기다가 감동적이고, 황당하다가 슬프고. 정신없는데 집중하게 된다.

액션 신도 미친다. 에블린이 영수증 뭉치로 싸우는 장면, 팬으로 싸우는 장면, 엉덩이에 트로피 꽂고 싸우는 장면, 모두 말이 안 되는데 말이 된다. 그냥 재밌다.

근데 그 모든 액션 신보다 기억에 남는 건 에블린과 조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주차장에서. 둘이 바위로 변한 우주에서. 아무 말도 안 한다. 그냥 바위로 서있다. 근데 그게 대화다.

웨이먼드가 진짜 좋았다. 키 호이 콴의 연기가 너무 좋았다. 웨이먼드는 영웅이 아니다. 멀티버스 중에서 가장 실패한 버전이다. 근데 그게 중요하지 않다.

웨이먼드는 이혼 서류를 준비한다. 에블린한테 줄. 근데 영화 내내 그걸 못 준다. 계속 기회를 놓친다. 아니, 기회를 만들지 않는다.

멀티버스를 경험하면서 웨이먼드는 깨닫는다. 어떤 우주에서건 자기는 에블린을 사랑한다는 걸. 성공한 우주에서도, 실패한 우주에서도. 그냥 사랑한다.

웨이먼드가 에블린한테 말한다. "그냥 친절하면 돼." 세상을 구하는 방법이 뭐냐고 물으니까. 엄청난 능력이나 계획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냥 서로에게 친절하면 된다는 거.

처음엔 이 말이 너무 순진하게 들렸다. 근데 영화 끝까지 보고 나니까 이해됐다. 맞다. 그게 답이다.

세무서 여직원이 에블린을 괴롭힌다. 디어드리(제이미 리 커티스)라는 이름인데, 처음엔 완전 악역이다. 짜증나고, 까칠하고. 근데 에블린이 멀티버스를 보면서 안다. 이 사람도 외롭구나. 이 사람도 그냥 인정받고 싶은 거구나.

그래서 에블린은 디어드리한테 친절하게 대한다. 그냥 조금. 그랬더니 디어드리가 변한다. 완전히.

영화는 이런 식으로 모든 걸 해결한다. 거창한 전투가 아니라 작은 친절로. 말도 안 되는데 말이 된다.

가족이라는 것

결국 이 영화는 가족 이야기다. 에블린, 웨이먼드, 조이. 세 사람의 이야기.

에블린은 딸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여자친구를 데려오는지, 왜 자기 말을 안 듣는지. 에블린은 자기 방식대로 딸을 사랑하는데, 그게 조이한테는 압박이다.

조이는 엄마가 자기를 있는 그대로 봐주길 원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엄마 기대에 못 미쳐도, 그냥 자기를 봐주길.

웨이먼드는 둘 사이에서 중재한다. 에블린한테도, 조이한테도 친절하려고 한다. 지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 마지막, 세무서에서. 세 사람이 서류를 정리하고 있다. 여전히 세탁소는 망해가고, 문제는 산더미고. 근데 이제는 다르다. 셋이 같이 있다. 진짜로 같이.

에블린이 조이의 여자친구를 장인어른한테 소개한다. 어색하지만 한다. 조이가 웃는다. 진짜 웃음.

그게 이 영화의 끝이다. 세상을 구한 영웅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가족이 조금 나아진 이야기.

근데 그게 더 큰 것 같았다.

영화 보면서 계속 생각했다. 나는 내 가족한테 친절한가? 당연하게 여기진 않았나? 이해하려고 했나?

에블린처럼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다. 더 성공할 수도, 더 멋진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근데 그게 중요한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지 않나?

영화가 끝나고 한참 앉아있었다. 정신은 아직도 없는데, 뭔가 따뜻했다.

이상한 영화다. 핫도그 손가락이나 나오고, 구글 눈 붙이고 싸우고, 완전 미쳤다. 근데 올해 본 영화 중에 제일 인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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