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함의 붕괴와 악순환의 반복
〈어쩔 수가 없다〉를 봤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웃기면서 동시에 가장 끔찍한 영화다.
만수(이병헌)는 완벽하게 모든 것을 이루고 있다. 안정적인 직업, 아내와 딸, 마련한 집. 그 모든 것이.
그런데 그 낙원이 한 순간에 무너진다.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해고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건가. 완벽해 보이던 모든 게.
그 순간부터 만수는 이전의 생활을 되찾기 위해 움직인다. 하지만 그 과정은 점점 더 어두워진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X 도끼》를 원작으로 했지만, 박찬욱은 단순한 범죄 스릴러가 아닌 사회 드라마를 만들었다.
영화의 핵심은 이것이다.
"사람은 넷, 자리는 하나."
정말 끔찍한 구조다. 만수는 자리가 고정불변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그 자리를 차지하려면 다른 경쟁자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처음 만수가 죽인 법모와 시조는 애초에 그 자리를 원하지도 않았다. 파피루스에 합격했다는 사실도 모르던 채 살해당한다. 그가 정말 죽여야 할 선출은 이미 그 자리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만수는 이미 죽인 두 사람의 시신들을 묻으면서도, 자신이 불필요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행한다.
이 모순이 너무 명확해서 불편했다.
박찬욱은 이 부조리를 정면으로 드러낸다. 《기생충》의 봉준호처럼 다루지만, 더 냉정하다. 고용주와 노동자가 싸우는 게 아니라, 해고된 노동자들끼리 싸운다. 회사는 이미 만수를 내버렸고, 만수는 회사를 되찾기 위해 다른 노동자들을 죽인다. 코미디이면서 동시에 끔찍하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장면에서 나는 웃었다. 웃음이 나왔다. 존 스미스와 포카운터스 이야기도, 레드 페퍼 인사부장 사기극도. 모두 웃음을 자아낸다.
그런데 웃으면서 죄책감이 들었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웃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박찬욱의 계산이었나 싶었다.
동시에 이것은 매우 정치적이다. 노동자 간의 경쟁을 조장하고, 제로섬 게임으로 만드는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다. 고용주는 남았고, 노동자들만 서로를 죽인다.
가정도 이 논리로 작동한다. 만수가 회사에서 해고되는 것과 아내 미리가 두 마리 개를 내보내는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 회사와 가정이 같은 무자비함으로 운영된다는 뜻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만수가 경쟁자 법모의 삶을 관찰하며 자신의 가정에 투영한다는 점이다. 법모의 아내가 "기계에는 윤활유가 필요하다"고 말하자, 만수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정확히 같은 말을 한다. "당신도 윤활유가 필요한데 미안하다." 법모가 "나는 종이밥을 먹어야 한다"고 하자, 만수도 같은 말을 한다. "나는 이 일밖에 할 수 없다."
타인의 삶을 자신에게 대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깨닫지 못하게 되어간다. 살인을 거듭할수록 만수는 고백의 정도를 높여간다. 첫 번째는 거짓 신분으로 속이고, 점점 자신의 진짜 정보를 드러내며, 마지막엔 모든 것을 밝힌다. 이병헌의 연기가 이 점진적 변화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코미디 연기와 심각한 감정 표현을 오간다. 그의 얼굴은 거의 표정이 없지만, 그 안에 절박함이 가득하다.
3대에 걸친 비극의 역사와 예고된 미래
영화의 가장 깊은 층위는 역사다.
만수가 다시 사들인 아버지의 집은 비극의 장소다. 아버지는 2만 마리 돼지가 집단 폐사하게 한 후, 창고에서 자살했다. 만수는 그 창고를 허물고 온실을 만든다. 비극의 흔적을 지우려는 시도다. 하지만 새로운 비극이 그 위에 쌓인다. 항상 그렇다. 지우려고 해도 더 깊은 것이 나온다.
만수가 사용한 북한제 권총은 아버지가 베트남전 참전 때 몰래 간직했던 것이다. 전쟁의 유산이 아들의 범죄를 낳는다. 영화는 만수의 살인과 아들의 휴대폰 절도 범죄를 교차 편집한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3대에 걸친 비극의 순환이다.
가장 섬뜩한 것은 나무 밑이다. 제지업의 핵심인 나무 밑에는 아들이 묻은 핸드폰, 과거 매립된 돼지, 만수가 묻은 시신들이 모두 있다. 한국의 번영 이면에 깔린 모든 비극들이 그곳에 묻혀 있다.
영화는 만수가 완전 범죄에 성공하고, 가족이 포옹하고, 새 직장에 출근하는 것으로 끝난다. 보기에는 해피 엔딩이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봤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가족은 돌아왔지만 신뢰는 무너졌다. 아내는 남편을 의심한다. 아들은 아버지를 의심한다. 만수는 9년을 지킨 금주 약속을 깨고 술을 마신다. 딸의 첼로 연주를 듣지 못한다. 감정적으로 가족으로부터 배제된 상태다. 이것이 대가다.
직장에서도 변했다. 예전에는 동료들을 자르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제는 면접에서 누군가를 해고시키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답한다. 인간이 타락했다. 그리고 그 타락을 자신이 깨닫지 못한다.
마지막 장면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만수가 새로 취업한 공장의 AI 소등 시스템이 하나씩 불을 꺼간다. 그 불이 꺼지는 순서가 기계적이다. 그 공장도 언젠가 구조조정을 할 것이고, 만수도 다시 해고될 것이라는 암시다.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는 뜻이다.
만수는 배우지 못했다. 아내를 이전과 똑같이 대하고, 직장에서도 똑같은 관행을 반복한다. 그가 흘린 피의 대가로 얻은 것은 뭔가. 낙원의 복구가 아니라, 더 큰 지옥으로의 진입이었다.
박찬욱의 정확한 폭로
이 영화를 본 후 오래도록 생각했다.
정말 오래.
만수가 정말 잘못된 사람인가. 그렇게 판단할 수 있을까. 그는 가족을 지키려고 했다. 딸의 첼로 값이 필요했다. 합리화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영화는 그 둘 다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만수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완벽해 보이는 삶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그 순간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정말 어쩔 수가 없을까.
영화의 제목은 질문이자 동시에 비판이다. "과연 어쩔 수가 없을까?" 이것이 핵심이다.
박찬욱이 보여주는 것은 이것이다. 어쩔 수 없다고 믿고 주장하며 행동하는 사람들(고용주든 노동자든)이 만들어낸 지옥이다. 그 지옥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구조를 바꾸려는 누군가의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그 구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병헌은 이 영화에서 완전히 새로운 면을 보여준다. 그의 얼굴은 거의 표정이 없다. 하지만 그 안에 모든 감정이 담겨 있다. 절박함, 죄책감, 절망, 그리고 수치심.
손예진, 이성민, 차승원 등 조연 배우들도 모두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다. 특히 차승원의 선출은 얼굴도 거의 나오지 않지만, 그의 비극이 명확하게 전달된다.
박찬욱의 촬영, 편집, 음악 모두 완벽하다. 장면장면이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고, 색감도 의도적이다. 제지공장의 거대한 기계, 가정 속의 평온함, 명확한 밤의 장면들. 모든 것이 이야기를 강화한다.
〈어쩔 수가 없다〉는 한국 사회의 가장 깊은 부분을 드러낸다. 구조조정, 해고, 경쟁, 불안정성. 그 모든 것이 만수라는 인물 속에 응축되어 있다.
영화는 완벽한 삶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무너짐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타락하는지도 보여준다.
웃음과 두려움이 섞여 있는 영화. 명확한 답이 없는 영화.
하지만 매우 정확한 영화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영화다.
이것이 박찬욱 감독의 진정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