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영화라고 해서 봤는데 음악보다 사람이 더 기억에 남은 영화다.
뉴욕이 배경이고, 음악이 전부인 영화.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는 영국에서 온 싱어송라이터다. 남자친구 데이브(애덤 리바인)를 따라 뉴욕에 왔다. 데이브는 유명해졌다. 그레타는 뭐, 그냥 남자친구의 여자친구.
데이브가 바람핀다. 유명해지니까 달라진 거다. 그레타는 떠난다. 뉴욕에 혼자 남는다.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고.
댄(마크 러팔로)은 음반 프로듀서였다. 과거형이다. 지금은 알코올 중독자에 실패한 중년 남자. 회사에서 쫓겨나고, 아내는 떠나고, 딸은 자기를 싫어한다.
어느 날 밤, 댄이 바에서 그레타의 공연을 본다. 친구가 억지로 무대에 올린 거다. 그레타는 기타 하나 들고 노래한다. 관객들은 관심 없다. 떠들고, 술 마시고.
근데 댄은 듣는다. 진짜로. 그 노래가 들린다. 아니, 노래 이상의 뭔가가 들린다.
댄이 그레타에게 다가간다. "앨범 내자." 그레타는 웃는다. 이 술 취한 아저씨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근데 댄은 진지하다. 자기가 프로듀서라고, 음반사가 있다고. 거짓말은 아니다. 과거에는.
그레타가 물어본다. "돈은?" 댄이 대답한다. "없어."
둘이 계획을 세운다. 스튜디오에서 녹음? 돈이 없다. 그럼 어떻게? 뉴욕 거리에서 녹음한다. 루프탑에서, 지하철역에서, 골목에서.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다. 근데 시작한다.
뮤지션들을 모은다. 돈 없으니까 재능 있는데 기회 없는 사람들. 젊은 첼리스트, 흑인 트럼펫 연주자, 바이올리니스트. 다들 각자의 이유로 참여한다.
첫 녹음 장소는 루프탑이다. 해질녘. 뉴욕 스카이라인이 보인다. 그레타가 노래한다. 뮤지션들이 연주한다.
이 장면이 진짜 좋았다. 스튜디오의 완벽함은 없다. 바람 소리도 들리고, 차 소리도 들리고. 근데 그게 더 생생하다. 살아있다.
음악이 공간을 채운다. 건물과 건물 사이로, 하늘로. 그레타의 목소리가 퍼진다.
카메라가 뉴욕을 담는다. 거리를, 사람들을, 건물을. 음악과 도시가 하나가 된다.
존 카니 감독은 이런 걸 잘한다. 음악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 원스에서도 그랬고, 이 영화에서도 그렇다.
각자의 재시작
그레타는 변한다. 처음엔 상처받은 여자였다. 데이브 때문에. 근데 음악을 만들면서 자기를 찾는다. 데이브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그레타로.
댄도 변한다. 술을 줄인다. 딸한테 연락한다. 일을 한다. 진짜로. 오랜만에 살아있는 느낌을 받는다.
딸 바이올렛(헤일리 스타인펠드)과의 관계가 좋았다. 처음엔 서먹하다. 바이올렛은 아빠를 원망한다. 술만 마시고, 일도 안 하고, 엄마한테 못되게 굴었으니까.
근데 댄이 바이올렛을 녹음에 데려간다. 기타를 치게 한다. 바이올렛은 잘한다. 진짜 잘한다. 댄이 놀란다. "언제 이렇게 늘었어?"
바이올렛이 말한다. "아빠가 모르는 게 많아."
그 한마디가 아팠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거리.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모르는 거.
녹음이 진행된다. 장소를 옮겨가면서. 센트럴 파크, 타임스퀘어 지하철역, 브루클린 골목.
각 장소마다 느낌이 다르다. 그게 노래에 반영된다. 도시의 소리가 음악이 된다.
한 장면이 기억난다. 지하철역에서 녹음하는데, 기차가 지나간다. 소음이 엄청나다. 다들 걱정한다. 근데 댄이 웃는다. "이거 쓰자. 이것도 뉴욕이니까."
그 발상이 좋았다.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담는다.
그레타가 데이브를 만난다. 데이브는 유명해졌다. 큰 공연장에서 콘서트한다. 그레타를 초대한다.
그레타가 간다. 객석에 앉아서 본다. 데이브가 노래한다. 관중이 환호한다. 화려하다. 멋있다.
근데 그레타는 안다. 저건 데이브가 아니라는 걸. 아니, 데이브가 맞는데 자기가 알던 데이브는 아니라는 걸.
데이브가 새 노래를 부른다. 그레타가 쓴 노래다. 둘이 함께 만들었던 곡. 근데 편곡이 완전히 바뀌었다. 화려하게, 상업적으로.
그레타의 표정이 변한다. 실망? 분노? 아니면 그냥 허무함?
공연 후에 만난다. 데이브가 말한다. "돌아와. 같이 음악 하자." 그레타가 묻는다. "내가 필요해서? 아니면 그냥 외로워서?"
데이브는 대답 못 한다.
그레타가 떠난다. 돌아보지 않고. 이미 끝난 거다. 데이브와의 관계도, 그 시절도.
음반사와의 협상
앨범이 완성된다. 댄이 음반사에 들고 간다. 옛날 동료였던 사울(모스 데프)에게.
사울이 듣는다. 좋아한다. "이거 대박이야." 계약서를 내민다.
근데 조건이 있다. 몇 곡을 빼야 한다. 상업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그리고 편곡도 바꿔야 한다. 라디오 친화적으로.
그레타가 거절한다. "이건 내 음악이야. 이대로가 좋아."
사울이 말한다. "그럼 못 팔아. 돈 한 푼도 못 벌어." 그레타가 웃는다. "상관없어."
댄이 놀란다. 그레타를 설득하려고 한다. 이게 기회라고, 다시 안 올 수도 있다고.
근데 그레타는 확고하다. "난 내 음악을 지킬 거야. 그게 더 중요해."
결국 다른 방법을 선택한다. 온라인으로 앨범을 푼다. 1달러에. 직접 판매.
사울이 비웃는다. "그렇게 해서 얼마나 팔리겠어?" 그레타가 대답한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근데... 팔린다. 엄청나게. 입소문이 난다. SNS로 퍼진다. 사람들이 듣는다. 진짜 음악을 원했던 사람들이.
영화 끝에 그레타와 댄은 헤어진다. 로맨스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냥 좋은 동료로, 친구로 남는다.
이게 좋았다. 남녀가 나오면 무조건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공식을 깬 거다. 둘은 서로를 존중한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레타는 자기 길을 간다. 음악을 계속한다. 데이브 없이. 댄 없이. 혼자서.
댄은 딸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술을 끊는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마지막 장면. 그레타가 거리를 걷는다. 이어폰을 낀다. 자기 음악을 듣는다. 웃는다.
뉴욕 거리가 보인다. 사람들이 걷고, 차가 지나가고. 그 속에서 그레타는 자기만의 리듬으로 걷는다.
카메라가 멀어진다. 그레타가 작아진다. 군중 속으로 사라진다. 근데 그게 슬프지 않다. 그냥 삶이 계속되는 거다.
음악이 좋았다. 정말 좋았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직접 불렀다고 한다. 목소리가 예뻤다. 완벽하지 않은데, 그게 오히려 좋았다.
애덤 리바인도 잘했다. 마룬5 보컬답게 노래는 당연히 좋고. 연기도 나쁘지 않았다. 데이브라는 캐릭터를 잘 표현했다. 성공하면서 변해가는 뮤지션.
마크 러팔로는... 뭐, 마크 러팔로다. 안정적이다. 망가진 중년 남자를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뉴욕이 또 하나의 주인공이었다. 도시 곳곳이 무대가 된다. 존 카니 감독은 뉴욕을 사랑하는 게 느껴진다. 카메라가 담는 모든 장면이 아름답다.
음악이 아니라 사람
이 영화는 음악 영화지만 음악 영화가 아니다. 사람에 관한 영화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음악을 통해 회복하는 이야기.
그레타는 음악으로 자기를 찾았다. 댄은 음악으로 삶을 되찾았다.
음악이 구원이라는 말이 진부할 수도 있다. 근데 이 영화는 그걸 진부하지 않게 표현했다. 과장하지 않고, 조용하게.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중반부가 좀 늘어진다. 몇몇 장면은 예상 가능하다. 감상적이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근데 나는 좋았다. 따뜻했다. 희망적이었다.
영화 보고 나서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이어폰 끼고 거리를 걷고 싶어졌다. 뉴욕은 아니지만, 내가 사는 이 도시를 음악과 함께 걷고 싶어졌다.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인생은 계속된다. 상처받아도,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음악처럼. 새로운 곡을 쓰듯이.
비긴 어게인. 다시 시작한다는 뜻.
제목이 영화를 잘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