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봤다. 영화 시작 10분 만에 우디 앨런 감독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만든 영화라는 걸 알겠더라.
길 주인공 잭(오웬 윌슨)은 소설가인데, 작품이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한다. 너무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는 약혼녀 에이미(레이첼 맥애덤스)와 함께 파리로 휴가를 간다. 에이미는 자신의 부모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고, 잭은 파리 거리를 걷고 싶어 한다.
이미 여기서 둘의 충돌이 시작된다. 하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잭은 밤 거리를 혼자 산책한다. 자정이 되자 1920년대 자동차가 나타난다.
그는 갑자기 황금시대의 파리로 넘어간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살바도르 달리, 파블로 피카소, 조앙 미로. 문학과 예술의 거장들이 모두 그곳에 있다.
잭은 자신이 원하던 세상에 들어간 것이다. 더 이상 현대적이지도, 상업적이지도 않은 순수한 예술의 시대로.
그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일 리 없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대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이곳이 정확히 자신의 영혼이 원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정말 치밀하게 만들어졌다.
현재의 파리는 번쩍거리는 명품 가게들로 가득 차 있고, 관광객들로 붐빈다. 반면 과거의 파리는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고, 예술가들의 대화와 웃음소리로 채워진다.
카메라는 현대 파리를 마치 죽은 도시처럼 찍고, 1920년대 파리를 생생한 세상처럼 표현한다. 어떤 파리가 더 매력적인지는 명확하다.
잭이 현재를 혐오하는 감정을 시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에이미라는 현실과 아드리아나라는 유혹
에이미는 좋은 여자다. 아름답고 똑똑하며, 잭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 에이미는 현실적이다.
남편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길 원한다. 잭의 소설이 팔리지 않는 것을 걱정한다. 미래에 대해 생각한다.
잭은 그러한 현실적 고민들이 자신의 영혼을 죽인다고 본다. "당신은 왜 자기 꿈을 포기했어?"
그가 에이미에게 묻는 대사다. 에이미는 현실 때문에 포기했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잭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꿈을 포기하는 게 뭔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를 말이다.
에이미와의 관계가 이미 끝났음을 이때쯤 알 수 있다. 근데 영화는 그것을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과거에서 잭은 아드리아나(마리온 꼬티야르)를 만난다. 그녀는 피츠제럴드의 보조 역할을 하는 여자다.
아드리아나는 아름답다. 1920년대에 살아가는 그 시대의 여자답게.
잭은 그녀에게 빠진다. 에이미와 함께하는 현재는 점점 싫어지고, 아드리아나와 함께하는 과거만 온전해진다.
아드리아나는 잭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사실 그녀도 같은 마음이라고.
"당신도 과거가 더 좋아?"
잭이 묻자 아드리아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1920년대를 좋아하지 않아. 1890년대 벨 에포크 시대를 그리워해."
그녀도 과거에 빠진 사람이다. 더 먼 과거를.
이 장면에서 영화의 핵심이 드러난다.
과거도 완벽하지 않다
아드리아나를 자신의 시대로 데려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1890년대로 말이다.
아드리아나는 그곳으로 떠난다. 더 나은 시대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결국 그 시대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현재일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도 자신의 과거를 그리워한다.
이것은 끝이 없는 순환이다. 과거는 항상 아름려 보인다.
왜냐하면 과거는 이미 완성됐기 때문이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미완성이지만, 과거는 확정되고 완료된 것이다.
완성된 것이 미완성인 현재보다 아름려 보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잭은 현재로 돌아온다. 파리의 밤거리에서.
에이미를 우연히 만난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영화는 잭이 무엇을 깨달았는지 직접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 행동으로 무언가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가 완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쓸모없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 같다.
이 영화를 본 뒤로 나는 현실이 답답해졌다.
우디 앨런이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이 영화에 투영한 건 명확해 보였다. 현실을 거부하고 과거에 빠지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예술적 영혼이 필요하다는 거창한 말로 정당화하는 사람.
잭의 대사들이 모두 합리화처럼 들렸다. "영혼을 죽일 수는 없어." "사랑이 없는 결혼을 할 수는 없어." "예술가는 이해하는 사람이 필요해."
우디 앨런이 세상을 향해 외치는 외침처럼 느껴졌다. "저는 현실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것을 찾는 거예요."
답답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잭의 행동이 에이미를 얼마나 상처 입히는지도 명확했다.
약혼녀의 부모 앞에서 무관심하고, 밤마다 사라지고, 다른 여자를 생각한다. 근데 영화는 그것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적 영혼의 불행으로 묘사한다.
이 영화가 좋은 이유는 아드리아나 때문이다.
마리온 꼬티야르의 연기는 정말 뛰어났다. 그녀의 아름다움만큼, 그 안에 담긴 슬픔도 깊었다.
아드리아나도 결국 같은 사람이다. 현실을 거부한 사람. 과거에 빠진 사람.
하지만 그 과거도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떠난다. 더 먼 과거를 향해.
아드리아나가 잭을 버리고 가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우리 모두가 계속 도망친다는 걸 보여준다.
한 시대에서 또 다른 시대로. 한 관계에서 또 다른 관계로.
〈미드나잇 인 파리〉는 결국 현재를 사는 법에 관한 영화다.
파리가 배경이지만, 어느 도시든 상관없다. 우리가 있는 곳은 항상 미완성이고, 불완전하고, 약간 지루하다.
반면 과거는 완성되었고, 아름답고, 영원히 미래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밤 12시를 기다린다. 자신의 황금시대로 돌아갈 그 시간을.
우디 앨런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만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가진 그 비밀스러운 욕망을 보여주기 위해.
내가 실제로 본 적도 없는 1920년대 파리.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가 있던 파리. 그곳은 이미 영원히 사라진 시간 속에 있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그곳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곳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도 알겠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현재에 만족할 수 있는가?
너는 완벽하지 않은 이 순간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너는 닿을 수 없는 과거를 포기할 수 있는가?
잭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여전히 불명확하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그 답을 숨겨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질문 자체다.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면서 항상 던져야 하는 질문. 그리고 우디 앨런도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다는 것.
어쩌면 그 평생의 고민이, 그의 모든 영화를 만든 원동력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