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이 삶을 바꾼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봤다.
기차가 달린다. 끝없이.
라이문트(제레미 아이언스)는 스위스 교사다.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너무나 평범해서 그 자신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리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여성을 구한다.
여성은 사라진다. 남겨진 것은 포르투갈어 책 한 권과 열차 티켓.
그 순간 뭔가 바뀐다.
라이문트는 수업을 집어치운다. 평생을 가르쳐온 학교를 포기한다.
기차에 오른다. 리스본으로.
이 영화는 책의 이야기다.
아마데우 프라두스라는 포르투갈 의사가 쓴 책. 그 책이 라이문트를 사로잡는다.
살라자르 독재 정권 시절, 저항운동을 했던 한 인간의 기록.
그 글들이 라이문트에게 말한다. 무엇인가 깊은 것.
라이문트는 아마데우를 찾기 위해 리스본 거리를 헤맨다.
그를 알았던 사람들, 그의 친구들, 그의 흔적들.
모두를 따라 다닌다.
그 과정이 영화 전체다.
이 영화는 빠르지 않다.
극적인 반전도 없다. 흥미진진한 반려도 없다.
대신 기차는 계속 달린다. 리스본의 골목도 천천히 펼쳐진다.
제레미 아이언스는 거기 서 있다. 생각하고, 듣고, 깨달아간다.
그의 얼굴은 지적이지만 동시에 불안하다.
한 명의 교사가 자신이 놓쳤던 모든 것을 이제사 찾으려 한다.
너무 늦은 건 아닐까.
그 질문이 계속 흐른다.
영화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타인의 삶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마데우의 삶을 추적하면서, 라이문트는 자기 자신의 빈 공간을 본다.
그 공간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것을 채우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마데우는 이미 죽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살아 있다.
라이문트는 그 글 속에서 응답한다.
영화 속 낡은 서점, 오래된 건물들, 기억의 무게를 느껴진다.
모든 것이 오래되었다.
그리고 그 오래됨이 깊이가 되어 화면을 누른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방식이 흥미롭다.
화려한 편집이 아니라, 단순히 오래된 것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관객은 시간을 느낀다.
제레미 아이언스는 그 시간 속에서 늙는다.
젊은 교사였던 그가, 여행을 통해 나이 든 인간으로 변한다.
아니, 처음부터 나이 든 인간이었는데, 그것을 깨닫는 것 같다.
삶이라는 문제에 답이 없다
영화는 물어본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이문트는 그 답을 찾으러 떠났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 그는 그 답을 얻지 못한다.
대신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선택과 기억이 모여 만드는 이야기라는 것.
정답이 없다면, 남은 것은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우리를 다르게 만든다.
이 영화에는 다양한 인간들이 나온다.
라이문트를 만나는 사람들.
그들은 아마데우를 알았던 사람들이다.
샤를롯 갱스부르, 멜라니 로랑 같은 유럽 명배우들이 각각의 추억으로 남는다.
그들의 모습이 아마데우의 삶을 조각조각 모아준다.
한 인간의 전모를 보려고 할 때, 다양한 증언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브루노 간츠 같은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가벼운 조연이 아니라, 각각 무게 있는 인물로 존재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책에 대해 생각했다.
책이 정말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
한 권의 책 때문에 누군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행을 떠난다.
그게 무모한 건가. 아니면 진실한 건가.
영화는 그것을 심판하지 않는다.
단지 라이문트가 그렇게 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관객은 그 선택의 의미를 자신에게 묻는다.
나라면 했을까.
나는 감히 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 영화의 배경이 열차라는 게 중요하다.
열차는 움직인다.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멈출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다.
인생이 그렇지 않을까.
우리도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라이문트는 기차 위에서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남은 미래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묻는다.
이 영화는 화려하지 않다.
거대한 감정의 폭발도 없다.
대신 조용하게, 끈질기게 남는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성공이다.
화려한 것들은 잊혀진다. 하지만 조용한 것들은 오래 남는다.
라이문트의 발걸음, 그의 눈빛, 그의 질문.
그것들이 계속 뇌리에 맴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지난 선택들을 되돌아봤다.
내가 왜 그 선택을 했는지.
그것이 나를 어디로 이끌었는지.
영화는 그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어떤 사건도, 어떤 비밀도 없는 영화다.
그런데 왜 계속 생각이 들까.
왜 시간이 지나도 그 이미지들이 떠오를까.
그것이 영화의 마력이다.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답을 주지도 않는다.
단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응답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당신의 열차는 어떤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가.
그 질문을 마주했을 때, 영화는 완성된다.
책 한 권이 삶을 바꾼다면, 영화 한 편도 삶을 바꿀 수 있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