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아이들의 세상을 가지고 있다
영화 장르가 뭔지 말하기 어렵다.
호러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니고, 판타지도 아닌 것 같은데. 다 섞여 있다.
이 영화는 아이 두 명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근데 한 명은 뱀파이어다.
따라서 이건 사랑 이야기인가, 공포 이야기인가, 아니면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인가. 세 가지가 모두 맞고, 모두 아니다.
오스카(카레 헤드비스트)는 12살 소년이다. 따돌림을 당한다.
학교에서 친구도 없고, 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떨어져 있다. 오스카는 혼자다.
그는 매일 밤 날씨가 추워질 때까지 마당에 나가 앉는다. 혼자.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이.
어느 날 밤, 옆집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 온다. 엘리(린다 모로악)라는 이름의 소녀.
엘리도 혼자다. 나이도 오스카처럼 12살쯤 되어 보이는데, 뭔가 다르다. 그녀는 밤중에만 나타난다.
둘은 우연히 만나고, 우정이 시작된다. 아무것도 아닌 우정처럼 시작되지만, 그것은 우정만이 아니다.
엘리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영화는 천천히 드러낸다.
처음엔 모호하다. 혼자만 밤에 나온다는 것, 햇빛이 나면 사라진다는 것, 피 냄새를 맡는다는 것.
하지만 결국 명확해진다. 그녀는 밤의 포식자다.
엘리는 사람을 죽인다. 오스카를 위해.
이 설정이 처음엔 낯설지만, 보다 보면 깊은 메타포라는 걸 안다.
뱀파이어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존재다. 낮의 세상에 속할 수 없고, 밤에만 살 수 있다.
엘리도 그렇다. 그녀는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낮의 인간세상에 속할 수 없다.
오스카도 비슷하다. 그는 왕따 소년이기 때문에 학교라는 낮의 세상에서 소외된다.
둘이 만나는 건 밤이다. 낮의 세상에서 모두에게 버림받은 존재들이 만나는 밤.
순수한 우정인가, 뭔가 더인가
둘의 우정은 깊어진다.
오스카는 엘리를 위해 주사기로 피를 뽑아준다. 그것이 사랑인지, 복종인지, 추종인지는 애매하다.
엘리는 오스카를 위해 살인을 한다. 학교에서 오스카를 괴롭히는 아이를 죽인다.
이건 뭐다. 우정의 극단적 표현인가, 사랑인가, 아니면 포식자의 소유욕인가.
영화는 그것을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에게 판단하게 만든다.
오스카는 엘리를 사랑하는가. 엘리는 오스카를 사랑하는가.
어쩌면 둘 다다. 어쩌면 둘 다 아니다.
스웨덴의 겨울 풍경이 정말 아름답게 찍혔다.
눈이 소복이 내린 마을, 얼어붙은 호수, 어두운 건물들. 모든 게 차갑고 외로워 보인다.
낮에 촬영된 장면들은 칙칙하고 억압적이다. 오스카의 학교, 엄마의 침대, 따돌리는 아이들.
반면 밤의 장면들은 고요하고 신비롭다. 두 아이가 함께 있는 밤이 가장 아름답다.
영화는 낮의 세상을 거부하고, 밤의 세상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뱀파이어는 결국 죽지 않는 존재다. 시간 속에서 성장하지도 변하지도 않는 존재.
엘리는 영원히 12살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자라지 않는다.
하지만 오스카는 자라야 한다. 그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것이 둘의 우정 속에 숨겨진 슬픔이다.
엘리가 오스카를 찾은 건 생존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피를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오스카도 엘리를 필요로 한다는 걸 안다. 자신의 고독을 덜어줄 누군가가.
결국 둘 다 외로운 존재들이다. 그리고 서로를 필요로 한다.
마지막 장면
영화의 끝은 기차다.
오스카는 기차 수하물칸에 숨어 있다. 그 안에는 엘리가 있다.
둘은 함께 도망친다. 어디로인지는 모르지만.
기차가 움직이는 소리, 엘리가 기차 벽을 톡톡 치는 소리. 그것이 영화의 끝이다.
이 장면이 희망적인가, 비극적인가.
오스카는 인간의 세상을 버렸다. 엘리는 영원히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다.
둘이 함께했다는 건 축복인가, 저주인가.
이 영화를 본 후 한참을 생각했다.
결론은 이거였다. 이건 뱀파이어 영화가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아이의 고독에 관한 영화였다.
어른들의 세상에서 설 곳이 없는 아이. 사회에서 배척된 아이.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
그런 아이가 만난 또 다른 아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존재.
아마 우리 모두가 어릴 때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혼자라고 느낀 경험. 누군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한 경험.
엘리가 뱀파이어라는 설정은 그 고독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뭔가 슬프고도 굉장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의 우정이 뭔가 끔찍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 명이 사람을 죽이고, 다른 한 명이 그 살인자를 따라간다.
이게 우정인가, 이게 사랑인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이 우정이 필연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스카는 학교에서 학대받는다. 집에서는 부모가 돌보지 않는다.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엘리는 뱀파이어다. 낮의 세상에 속할 수 없다. 아무도 그와 함께할 수 없다.
둘이 만난 것은 필연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영화는 우리를 도덕적 판단에 맡기지 않는다.
엘리가 사람을 죽인다. 그건 명백한 악행이다.
하지만 그건 오스카를 위한 것이다. 학대자를 제거하고, 오스카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엘리를 악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오스카를 보호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그 질문을 끝까지 유지한다. 답을 주지 않으면서.
〈렛미인〉은 스웨덴의 어두운 겨울을 배경으로 한다.
해가 거의 떠오르지 않는 그곳. 추위와 고독이 지배하는 그곳.
이런 환경이 아이들의 고독을 극대화시킨다. 밝은 곳에서의 고독과 어두운 곳에서의 고독은 다르다.
스웨덴의 겨울은 고독을 증폭시킨다.
이 영화의 가장 무서운 부분은 뱀파이어가 아니다.
가장 무서운 부분은 어른들의 무심함이다. 오스카를 괴롭히는 선생님.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 부재중인 아버지.
어른들은 오스카의 고통을 보지 못한다. 또는 보고도 무시한다.
엘리가 나타나서 그 모든 고통을 끝내준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동시에 매력적인가.
누군가가 자신을 완전히 보호해줄 것 같은 환상.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위험한 메시지다.
이 영화는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정도로 강렬하고, 그 정도로 슬픈 영화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은 계속 남아 있다.
우리는 아이들의 고독을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는가. 학교 폭력이나 가정 문제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 만약 누군가가 그 아이를 구해준다면, 그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
답은 없다. 영화도 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아이는 아이들의 세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 어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리고 때로 그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어둠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는 그 어둠을 보여준다. 아름답고, 끔찍하고, 슬프게.
그 어둠 속에서 두 아이가 서로를 찾는다. 그것이 구원인지, 저주인지는 여전히 불명확하다.
하지만 그것이 필연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