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17 리뷰: 봉준호는 왜 논란이 됐나? 기생충과의 차이점
2025년 2월 28일 개봉했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이다. <기생충> 이후 6년 만이다.
기대가 컸다. 아카데미 4관왕 감독의 복귀작이었다. 제작비 1690억 원을 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였다. 로버트 패틴슨 주연이었다.
근데 논란이 됐다. 평가가 갈렸다. 흥행이 기대에 못 미쳤다. 왜 그랬을까?
기대와 현실의 괴리
<기생충>이 너무 컸다. 201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받았다. 한국 영화 최초였다. 전 세계가 봉준호에게 열광했다.
그래서 <미키17>에 대한 기대가 과도했다. 관객들은 <기생충>을 뛰어넘는 작품을 원했다. 또 한 번의 충격을 원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걸 원했다.
근데 <미키17>은 달랐다. <기생충>처럼 날카롭지 않았다. <기생충>처럼 완벽하게 짜여있지 않았다. <기생충>처럼 보편적이지 않았다.
개봉 4일 만에 100만 명을 넘겼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근데 그게 다였다. 2주 차부터 관객이 급감했다. 평일 관객이 5만 명 아래로 떨어졌다. 최종 300만 명 정도를 기록했다. <기생충>의 1000만 명과는 비교가 안 됐다.
북미 흥행도 실망스러웠다. 글로벌 박스오피스 1억 1천만 달러를 벌었다. 제작비 1억 2천만 달러와 마케팅 비용을 고려하면 손실이었다. 버라이어티는 "워너브라더스에 큰 손실을 안겨줄 것"이라고 썼다. 1170억 원의 적자를 냈다는 보도도 나왔다.
평단 평가도 역대 봉준호 영화 중 가장 낮았다. 로튼 토마토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메타크리틱 점수도 낮았다. "봉준호의 세 번째 영어 영화 중 가장 약한 작품"이라는 평까지 나왔다.
관객 반응은 양극단으로 갈렸다. CGV 골든에그 지수는 90%였다. 네이버 평점은 8점대였다.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 좋아했다. "역시 봉준호" "SF 영화의 새 지평" "로버트 패틴슨 연기 대박"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근데 실망한 사람도 많았다. "봉준호 영화 중 제일 재미없음" "기대를 너무 많이 했나" "설국열차와 옥자를 섞은 느낌"이라는 평도 쏟아졌다. 특히 봉준호 팬들이 더 실망했다. 봉준호답지 않다는 거였다.
<기생충>과 <미키17>, 무엇이 다른가
<기생충>은 완벽했다. 초반의 질주가 있었다. 기택 가족이 박 사장 집에 하나씩 침투하는 과정이 통쾌했다. 긴장감이 넘쳤다. 관객이 숨을 쉴 틈이 없었다.
중반의 반전이 충격적이었다. 지하실에 문광 남편이 있었다. 계단 아래 또 다른 가난이 있었다. 관객이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서늘한 충격이었다.
후반의 폭발이 카타르시스를 줬다. 기택이 칼을 들었다. 억눌렸던 분노가 터졌다. 계급 갈등이 폭력으로 분출됐다. 관객이 할 말을 잃었다.
메시지가 명확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대립이었다. 계단 위와 계단 아래의 이야기였다. "누가 진짜 기생충인가?"라는 질문이 선명했다. 한국 사회의 디테일이 살아있었다. 짜파구리, 반지하, 수석, 모스 부호. 모든 게 상징이었다.
<미키17>은 달랐다. 봉준호 특유의 템포가 사라졌다. 초반의 질주가 없었다. 영화가 천천히 진행됐다. 미키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반복했다. 관객이 지루해했다.
중반의 반전도 약했다. 미키 17과 미키 18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설정이 핵심이었다. 근데 그 긴장감이 오래가지 못했다. 둘이 서로를 없애려는 장면도 치열하지 않았다. 봉준호 특유의 '난장'이 느껴지지 않았다.
메시지 전달 방식도 달랐다. <기생충>은 은유로 말했다. 관객이 해석할 여지를 줬다. 다양한 관점이 가능했다. 근데 <미키17>은 직접적으로 말했다. 권력자 마셜이 독재자처럼 그려졌다. 익스펜더블 제도가 계급 착취를 상징했다. 너무 명확했다. 봉준호답지 않게 설명적이었다.
풍자의 날카로움이 무뎌졌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한 마디 대사, 한 장면의 공기에도 풍자가 묻어났다. <괴물>에서는 무능한 정부가 코미디처럼 그려졌다. <기생충>에서는 "선을 넘지 마세요"라는 대사 하나에 계급이 담겼다.
근데 <미키17>의 풍자는 투박했다. 마셜이 트럼프나 윤석열 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는 반응이 나왔다. 맞다. 닮았다. 근데 그게 다였다. 더 깊은 통찰이 없었다. 표면적이었다.
사회 비판도 일반적이었다. 자본주의 비판, 계급 착취, 권력의 폭력. 봉준호가 늘 다뤄온 주제였다. 근데 <미키17>에서는 새롭지 않았다. <설국열차>와 <옥자>를 합쳐놓은 느낌이었다. 신선함이 부족했다.
캐릭터도 달랐다. <기생충>의 기택, 기우, 기정은 생생했다.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진짜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생존 전략이 절박했다. 관객이 공감했다.
<미키17>의 미키는 멀게 느껴졌다. 17번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사람이었다. 익스펜더블이라는 설정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관객이 감정 이입하기 어려웠다.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는 좋았다. 1인 2역을 소화했다. 근데 캐릭터 자체가 공감을 얻기 힘들었다.
SF 장르와 봉준호의 불협화음
봉준호는 리얼리즘의 감독이었다. <살인의 추억>의 연쇄살인, <괴물>의 한강 괴물, <마더>의 모성, <기생충>의 계급. 모두 현실에 뿌리를 뒀다. 환상적인 요소가 있어도 현실감이 살아있었다.
<미키17>은 순수 SF였다. 2054년 우주가 배경이었다. 얼음 행성 개척이 소재였다. 복제 인간이 주인공이었다. 외계 생명체 크리퍼가 나왔다.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봉준호가 이 장르를 소화하기 어려워 보였다. 우주선 내부, 얼음 행성 풍경, SF 디자인. 기술적으로는 완성도가 높았다. 근데 봉준호 색깔이 잘 안 느껴졌다. 그냥 할리우드 SF 같았다.
크리퍼라는 외계 생명체도 애매했다. <옥자>의 옥자처럼 생명체에 대한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 근데 크리퍼에게 감정 이입이 안 됐다. 그들의 스토리가 충분히 전개되지 않았다. 후반부에 미키와 나샤가 크리퍼 편을 드는 장면도 설득력이 약했다.
할리우드 시스템의 영향도 있어 보였다. 워너브라더스가 제작했다. 1690억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갔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출연했다. 이런 환경에서 봉준호가 자기 색깔을 완전히 구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제작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2022년 촬영을 마쳤다. 근데 2년 3개월이나 개봉이 미뤄졌다. 배우 조합 파업 때문이라고 했다. 근데 소문이 많았다. 워너브라더스와 봉준호의 갈등설도 돌았다. 워너가 전형적인 SF 장르물을 원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개봉 시기도 이상했다. 2월은 비수기였다. 오스카를 노렸다면 연말에 개봉해야 했다. 영화제를 노렸다면 가을에 개봉해야 했다. 2월 개봉은 워너가 영화에 자신이 없었다는 방증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VOD 출시 소식도 빨랐다. 개봉 한 달 만에 VOD로 나온다는 보도가 나왔다. 극장 관객 유입에 치명적이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집에서 볼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래도 봉준호는 봉준호다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근데 여전히 수작이었다. 봉준호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도 못 나왔을 거다.
블랙 코미디는 살아있었다. 미키가 죽는 장면들이 유머러스했다. 미키 17과 미키 18이 서로를 속이는 장면도 재미있었다. 봉준호 특유의 블랙 유머가 곳곳에 숨어있었다.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는 훌륭했다. 미키 17과 미키 18을 완전히 다르게 연기했다. 미키 17은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함이 있었다. 미키 18은 조금 더 영리하고 계산적이었다. 둘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진짜 두 사람 같았다.
시각적 완성도는 높았다. 우주선 디자인, 얼음 행성 풍경, 크리퍼 디자인. 모두 공들였다. 장희철 아티스트가 만든 크리퍼는 <괴물>의 한강 괴물, <옥자>의 옥자를 만든 사람답게 독특했다.
메시지 자체는 여전히 의미 있었다. 소모품 취급받는 노동자, 권력의 폭력, 생명 경시. 우리 시대의 문제를 담았다. 표현 방식이 직접적이었을 뿐 메시지는 중요했다.
사랑 이야기도 진심이었다. 봉준호가 처음 다룬 로맨스라고 했다. 미키와 나샤의 관계가 영화의 중심이었다. 서툴렀지만 따뜻했다. 미키가 나샤를 위해 선택하는 장면들이 감동적이었다.
평론가 이동진은 별 4개를 줬다. "파고들수록 넓어지는 흥미진진한 역설이 새벽별처럼 반짝이는 유머에 담겼다"고 평가했다. 긍정적으로 본 관객들은 "봉준호만의 색깔"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라고 말했다.
봉준호의 변화, 그리고 미래
봉준호가 변하고 있다. <기생충>부터 느껴졌다. 날카로운 풍자가 무뎌지고 있었다. 은유보다 직접적 표현이 늘어났다. 송곳 같던 시선이 둔탁해졌다.
<미키17>에서 그 변화가 더 뚜렷해졌다. 어떤 평론가는 "본인의 주제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한계"라고 지적했다. "할리우드 배우, 어마한 자본으로 그간 해왔던 작가주의적 시선을 똑같이 적용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봉준호는 여전히 같은 주제를 다룬다. 계급, 폭력, 자본주의. 근데 환경이 바뀌었다. 할리우드 시스템, 거대 자본, 글로벌 관객. 이 안에서 봉준호의 색깔을 완전히 구현하기 어려웠다.
어떤 의미에서 <미키17>은 실험이었다. 봉준호가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자기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 실험한 거였다. 결과는 반반이었다. 완전히 실패하지도 않았고, 완전히 성공하지도 않았다.
근데 이 실험이 무의미하지 않다. 봉준호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 궁금해진다. <미키17>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와서 <살인의 추억> 같은 영화를 다시 만들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봉준호는 여전히 중요한 감독이라는 거다. <미키17>이 기대에 못 미쳤어도, 여전히 수작이었다. 다른 감독이었다면 이만큼도 못 만들었을 거다.
그리고 <기생충>과 비교하는 게 애초에 불공평했다. <기생충>은 기적 같은 영화였다.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영화였다. 그걸 매번 기대하는 건 무리다.
<미키17>은 봉준호 필모그래피에서 실험작으로 기억될 거다. 완벽하진 않지만 의미 있는 시도였다. 실패에서 배우는 게 많다. 봉준호도 그럴 거다.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봉준호는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미키17>로 실망한 사람들도 다음 작품은 볼 거다. 그게 봉준호의 힘이다.
평범한 영화였다면 논란도 안 됐을 거다. 논란이 된 건 봉준호이기 때문이다.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그 기대가 부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봉준호의 위상을 증명한다.
<미키17>은 봉준호의 최고작은 아니다. 근데 여전히 볼 만한 영화다. 완벽하진 않아도 생각할 거리를 준다.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