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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첫사랑

by lazypenguinclub 2025.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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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여름, 그리고 첫사랑의 기억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리뷰입니다.

이 영화는 줄거리를 따라가기보다 감정과 계절, 공기 같은 것들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사랑 이야기를 가장 조용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1983년 여름, 북부 이탈리아의 햇살 아래. 17살 소년 엘리오와 그의 집에 머물게 된 미국인 청년 올리버.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느리게, 아주 조용하게 변화합니다. 처음엔 어색했고,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 낯섦이 조금씩 설렘으로 바뀝니다. 이 영화는 그런 변화의 결을 집요하리만큼 세심하게 따라갑니다.

감정의 시간, 두 인물의 관계

이야기의 흐름은 단순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감정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장면들은 빠르게 전개되지 않고, 인물도 쉽게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엘리오가 올리버를 바라보는 시선, 손끝의 머뭇거림,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 순간들이 오히려 말보다 많은 것을 전합니다.

영화 속 시간은 현실의 시간보다 천천히 흐릅니다. 혹은, 감정이 느끼는 시간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엘리오의 방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 창문 틈으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여름 특유의 나른함 같은 것들이 장면마다 배어 있습니다. 화면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여름 안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올리버는 자유롭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입니다. 처음엔 그런 모습이 엘리오에게 낯설고 멀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존재는 점점 더 마음속 깊숙이 자리잡습니다. 이 감정은 누구보다도 조심스럽게 시작됩니다. 명확한 고백 같은 건 없습니다. 눈빛 하나, 무심한 손짓 하나에 담긴 감정이 오히려 더 크게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건, 인물들의 감정을 ‘말’이 아니라 ‘시간’으로 보여준다는 점이었습니다. 무엇을 설명하기보다 보여주고, 보여주기보다 느끼게 합니다. 긴 정적, 흐릿한 빛, 인물의 숨소리까지 감정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음악도 영화의 감정선과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엘리오가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나 수프얀 스티븐스의 곡이 흐를 때, 감정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특히 영화 후반에 흐르는 ‘Visions of Gideon’은 마지막 장면의 울림을 몇 배로 깊게 만들어줍니다. 엘리오가 벽난로 앞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릴 때, 음악은 그가 하지 못한 말을 대신합니다.

영화는 사랑의 시작과 끝, 그 모든 순간이 필요했다고 말합니다. 아팠기 때문에 진짜였고, 슬펐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아버지가 엘리오에게 해주는 말도 인상 깊었습니다. 고통을 피하지 말라고, 사랑했다는 증거를 지우지 말라고 말해줍니다. 그 조용한 조언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흔적과 여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사랑이 반드시 오래가야 한다거나, 완전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짧았지만 강렬한 감정이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제대로 겪고 나면, 조금 더 깊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과수원의 복숭아, 여름 호숫가, 자전거로 달리는 길, 모두가 지나가는 풍경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많은 감정이 들어 있습니다. 그 순간들이 사라지더라도, 그 여름의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영화는 조용히 알려줍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엘리오가 말 없이 카메라를 마주할 때, 우리는 그의 감정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침묵이 전하는 건 너무도 많습니다. 사랑은 끝났지만, 그 사랑이 만든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한 계절, 한 사람, 하나의 사랑이 마음속에 얼마나 오래 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감정을 요란하게 다루지 않기에 오히려 더 오래 남습니다. 아주 오래전, 우리 각자 마음속에 있었던 그 여름과 첫사랑의 기억을 조용히 꺼내보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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