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이 반전을 낳는 영화
<아가씨>를 봤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항상 예상을 벗어난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사기꾼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경성. 사기꾼 연우(박성웅)와 그의 파트너 미키(박해일)가 대백작 아래미(민하영)를 노린다.
아래미는 엄청난 재산을 가진 여자다. 그녀를 속여서 재산을 빼앗는 것이 목표다.
간단한 이야기처럼 시작된다. 하지만 보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
처음엔 고전적인 사기 영화인 줄 알았다. 사기꾼들이 정교한 계획을 세우고, 한 단계씩 실행하고, 마지막에 성공한다. 그런 식의 흐름을 예상했다.
하지만 박찬욱은 그런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누가 누구를 속이는가가 아니라, 각 인물이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다.
연우는 왜 이 사기를 벌이려고 하는가. 미키는 연우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 아래미는 정말 순진한 여자인가. 이 질문들이 영화를 지배한다.
처음엔 아래미가 피해자처럼 보인다. 부자이지만 외로운 여자. 아버지의 정부인 간담(조영우) 밑에서 억압당하며 산다.
연우가 나타나 그녀의 세계를 바꾼다. 연우는 직접적이다. 달콤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준다. 아래미는 연우에게 끌린다. 처음엔 호기심에서, 나중엔 다른 감정으로.
하지만 아래미도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녀도 계산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사기꾼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도 사기꾼이었을 수도 있다.
미키는 간담과 함께 사기를 진행한다. 표면적으로는 아래미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서다. 하지만 실제 미키의 욕망은 다르다. 그것은 연우에 대한 집착이다. 미키는 연우를 소유하고 싶다.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
사기라는 장치 속에서 미키는 연우를 자신의 곁에 묶어두려고 한다. 박해일의 연기가 이것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미키는 우아하고 다정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깊은 독점욕이 있다.
연우는 가장 수동적으로 보인다. 미키의 계획에 따르고, 아래미를 속인다. 마치 조종당하는 사람처럼.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연우도 자신만의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안다. 그는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만 생각한다.
박성웅은 이 인물을 신비롭게 표현한다. 그의 얼굴은 항상 무표정이지만, 그 뒤에는 뭔가 계산이 있다.
1930년대 경성과 반전의 구조
박찬욱의 영상미는 이 영화에서 극대화된다. 식민지 경성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건축물들, 의상들, 소품들. 모든 것이 그 시대를 정확하게 반영한다.
하지만 단순히 역사적 배경만은 아니다. 1930년대 경성은 사기꾼들이 활동하기 좋은 공간이다. 신분 제도가 무너지고 있고, 새로운 부자들이 생겨나고,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는 시대. 그 변화 속에서 사기도 가능해지고, 욕망도 노출된다.
박찬욱 영화의 특징은 관능과 폭력의 공존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아래미와 연우의 관계 장면들이 굉장히 노골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에로가 아니라, 권력과 소유의 표현이다. 관능이 폭력과 섞여 있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가 항상 불분명하다.
민하영의 연기가 이것을 표현하는 데 탁월하다. 그녀는 피해자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가해자처럼 움직인다.
이 영화는 반전으로 가득 차 있다. 매 순간 관객의 예상이 깨진다. 누가 속고 있는 건지, 누가 속이고 있는 건지 모르게 된다.
하지만 박찬욱은 단순히 반전만을 위한 반전을 하지 않는다. 각각의 반전이 인물의 심리를 드러낸다. 그들의 욕망과 비밀이 점층적으로 벗겨진다. 마지막 반전에 이르면, 영화 전체가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세 인물 모두가 누군가를 신뢰해 보려고 한다. 하지만 모두가 배신당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연우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미키는 연우만 믿는다. 아래미는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 불신의 구조 속에서 사기가 벌어진다.
계산된 완벽함
<아가씨>는 계산된 영화다. 박찬욱 감독이 모든 것을 정확하게 설계했다. 각 장면, 각 대사, 각 행동이 모두 의도적이다.
박성웅, 박해일, 민하영. 세 배우의 호흡이 완벽하다. 박성웅은 신비로운 매력으로 화면을 지배한다. 박해일은 우아함 속의 절망을 표현한다. 민하영은 약함과 강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세 배우가 모두 자신의 최고 연기력을 발휘했다.
한 번 보면 부족하다. 다시 봐야 전체 구조가 보인다. 처음 본 때는 사기극으로 보이지만, 다시 보면 심리 드라마로 보인다. 세 번째 본다면 또 다른 해석이 생길 수 있다.
이것이 이 영화의 진정한 강점이다. 단순하지 않다는 것. 쉽지 않다는 것. 그래서 자꾸만 돌아보고 싶게 만든다는 것.
<아가씨>는 사기극이면서 동시에 욕망의 영화다. 각 인물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다. 돈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연우는 자유를 원한다. 미키는 연우를 원한다. 아래미는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사랑받기를 원한다.
이 욕망들이 충돌하면서 사기가 벌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두가 상처를 입는다. 마지막에 남는 건 뭔가. 돈도 없고, 자유도 없고, 사랑도 없다. 그냥 상실과 후회만 남는다.
<아가씨>는 박찬욱 감독의 최고작 중 하나다. 복잡한 구조를 완벽하게 조종하고, 절제된 감정을 강력하게 표현하고, 시각적 아름다움과 심리적 깊이를 동시에 담았다.
이것은 오락 영화이면서 동시에 예술 영화다. 상업적이면서도 순수하다. 한국 영화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다시 보고 싶은 영화. 볼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영화. 그것이 <아가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