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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토커〉 - 사냥꾼이 나타났다

by lazypenguinclub 2025.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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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이라는 공간의 재편

스토커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찰리는 사냥꾼이다.

그가 노리는 대상은 부를 (니콜 키드먼)다.

아니, 정확히는 부를과 그녀의 딸 인디아(미아 와시코우스카)다.

찰리는 천천히 가정을 장악한다.

처음엔 따뜻한 삼촌처럼 행동한다.

인디아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고, 그녀를 이해한다고 말한다.

어떤 순간부터 찰리의 진의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가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암시.

그가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느낌.

박찬욱은 이 불안감을 아주 천천히 높여간다.

영상으로, 음악으로, 배우들의 표정으로.

부를은 찰리에게 유혹당한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으로 절망하고 있었다.

새로운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다시 살려낸다.

그녀는 감사한다. 그리고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그 사랑 뒤에는 계산이 있다.

찰리의 모든 행동은 목적이 있다.

인디아의 깨달음

인디아는 고등학생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그녀는 고향에 머물지 않고, 음악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거부한다.

찰리가 나타나면서 인디아의 세계가 열린다.

그는 그녀를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녀와 같다고 말한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인디아는 그에게 끌린다.

아버지 같으면서도 다른 무언가로.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디아는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한다.

찰리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미아 와시코우스카의 표정 변화가 이 과정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처음엔 호기심, 나중엔 불안감, 그 다음엔 깨달음.

욕망과 폭력의 경계

박찬욱이 이 영화에서 묻는 질문은 이것이다.

나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정말 날 이해하는가.

나를 사랑한다는 게 정말 사랑인가.

찰리는 인디아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이다.

그는 인디아를 자신과 같다고 본다.

그리고 자신의 비밀스러운 세계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이것이 유혹이다.

그리고 동시에 폭력이다.

박찬욱의 특징은 이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다.

관객도 혼란스러워진다.

찰리가 나쁜 사람인가, 아니면 인디아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인가.

그의 행동은 사랑인가, 아니면 학대인가.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더 깊은 혼란으로 빠뜨린다.

매튜 고디의 연기가 이것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그는 매력적이면서도 위협적이다.

다정해 보이면서도 뭔가 계산이 있어 보인다.

아무도 그가 정말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시각적 강압

박찬욱의 영상미는 이 영화에서 일종의 폭력으로 작용한다.

모든 장면이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

건축물의 선들, 빛과 그림자, 색감.

그 완벽함이 오히려 불안감을 만든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공간처럼 느껴진다.

찰리가 가정을 장악하듯이, 박찬욱은 영상을 통해 관객을 장악한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현악기의 울음이 불안감을 계속 유지한다.

쾌적해야 할 미국의 대저택이 감옥처럼 느껴진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계속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점은 가정 내 비밀의 위력이다.

모든 가족에는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은 때로 가정을 파괴한다.

찰리가 가지고 온 비밀.

부를이 숨기고 있는 비밀.

인디아의 아버지가 감춘 비밀.

이 모든 비밀들이 얽혀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진실이 뒤섞여 온다.

누가 거짓을 말했는지, 누가 진실을 아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관객도 혼란스러워진다.

지금까지 본 것이 정말 그런 의미였나.

미국 내 한국인의 시선

박찬욱이 할리우드에서 만든 이 영화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서양의 상류층 가정을 박찬욱은 어떻게 보는가.

그 아름다움 뒤의 어두움을 그는 어떻게 표현하는가.

박찬욱의 영화는 항상 표면 아래의 욕망과 폭력을 본다.

〈스토커〉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대저택, 부자들의 일상, 예의 바른 대화.

그 모든 것 아래에는 원시적인 욕망이 흐르고 있다.

박찬욱은 그것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것을 관객의 얼굴에 들이댄다.

〈스토커〉는 불편한 영화다.

끝까지 편안함이 없다.

누군가는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모르게 된다.

따뜻한 삼촌도 피해자도 아닐 수 있다.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고 있다.

그 욕망의 형태가 다를 뿐이다.

니콜 키드먼의 연기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유혹당하는 여인을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감춘다.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도 욕망의 주체다.

완벽한 통제

〈스토커〉는 박찬욱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영화다.

영상, 음악, 배우들의 움직임, 각 장면의 타이밍.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다.

관객도 그 통제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찰리처럼 모든 것을 관찰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관찰 속에서 불안감을 느낀다.

이것이 박찬욱의 영화가 주는 경험이다.

단순한 관조가 아니라, 일종의 폭력적 경험.

찰리가 인디아에게 하는 것을 우리도 당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스토커〉는 박찬욱 감독의 독특한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서양 배경과 할리우드 배우들을 완벽하게 소화한 영화다.

혐오와 매력, 사랑과 욕망, 이해와 소유가 끊임없이 뒤섞인다.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계속 질문하게 된다.

찰리는 누구인가. 그의 목적은 무엇인가.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화는 그 질문들에 답하지 않는다.

대신 더 깊은 불안을 남긴다.

박찬욱의 최대의 무기는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폭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스토커〉는 그것을 완벽하게 실행한 영화다.

화려한 영상으로 포장된 심리적 폭력.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은폐된 욕망의 추구.

이 모든 것이 섞여 가정을 잠식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오직 관객으로서 목격할 수 밖에 없다.

변할 수 없는 미래를 바라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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