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리뷰,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

by lazypenguinclub 2025. 9. 2.

문명이 무너질 때 남는 것

서론 – 문학에서 영화로

〈눈먼 자들의 도시〉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을 원작으로, 〈시티 오브 갓〉으로 알려진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연출했습니다. 원작은 은유와 비유가 짙은 문학적 텍스트였기에 영화화가 어려운 작품이었지만, 감독은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와 리얼리즘적 연출을 통해 사회 붕괴의 디스토피아를 화면에 옮겨왔습니다.

줄거리 – 하얀 어둠의 시작

어느 날 원인 불명의 전염병처럼 ‘실명’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깜깜한 어둠이 아니라, 눈앞이 하얗게 보이는 ‘백색 실명’입니다. 정부는 감염을 막기 위해 환자들을 격리 수용소에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감염은 멈추지 않고, 격리소 안은 금세 지옥도가 됩니다. 식량은 부족해지고, 힘 있는 집단은 약자를 억압하며, 도덕과 질서는 붕괴합니다.

이 혼란 속에서 유일하게 시력을 잃지 않은 의사의 아내(줄리안 무어)는 남편을 따라 격리소에 들어가, 눈먼 자들을 이끌며 절망적인 상황에서 작은 희망과 존엄을 지켜내려 합니다.

백색의 공포

영화는 독특하게도 ‘하얀 어둠’을 시각적으로 구현합니다. 흔히 실명은 ‘검은 어둠’으로 표현되지만, 여기서는 눈앞이 뿌옇게 번지는 백색의 화면이 반복되며 관객에게 불안과 혼란을 체감하게 합니다. 또한 카메라는 흔들리고, 초점이 맞지 않으며, 때로는 인물을 화면 밖으로 밀어내며 혼돈을 시각적으로 전달합니다. 이는 단순한 전염병 영화가 아니라, 감각과 인식 자체를 무너뜨리는 경험을 제공하는 장치입니다.

주제 – 문명의 붕괴와 인간성의 시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전염병 영화의 외형을 띠지만, 본질적으로는 문명과 윤리에 대한 은유입니다. 사람들이 시력을 잃자마자 사회적 규범과 도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인간은 원초적 폭력과 욕망에 휘둘립니다. 권력과 폭력으로 식량을 독점하는 집단, 여성들을 착취하는 집단이 등장하면서, 문명의 외피가 얼마나 얇은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연대와 존엄의 가능성도 제시합니다. 시력을 유지한 의사의 아내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눈먼 자들을 인도하며 희망을 지켜냅니다. 그녀는 인류가 끝내 의지해야 할 마지막 윤리적 시선, ‘양심’의 화신으로 그려집니다.

배우들의 연기 – 절망 속의 얼굴들

줄리안 무어는 눈을 뜨고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무거운 책임과 절망을 동시에 짊어진 인물을 깊이 있게 연기합니다. 마크 러팔로는 무력해진 의사로, 제도의 붕괴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며, 앨리스 브라가,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등 조연 배우들은 혼란과 공포 속에서 무너지는 인간 군상의 얼굴을 생생하게 담아냅니다.

원작 소설의 특징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독특한 문체와 은유적 깊이로 유명합니다. - 문장에 마침표가 거의 없고, 대사와 서술이 쉼표로만 이어져 흐르는 듯한 리듬을 만듭니다. - 인물들에게 이름을 주지 않고, ‘의사의 아내’, ‘첫 번째 눈먼 남자’, ‘검은 안대를 한 여자’와 같이 묘사로만 지칭합니다. 이는 집단적 비극 속에서 개인성이 지워지고, 인류 전체를 은유적으로 담아내려는 장치입니다. - ‘실명’은 단순한 병이 아니라, 권력과 탐욕, 무관심 속에서 사회가 얼마나 쉽게 붕괴되는지 보여주는 거대한 상징입니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은 시력이 아니라 도덕과 양심입니다.

영화의 특징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영화는 이러한 소설의 은유를 영상적으로 구현하려 했습니다. - 실명의 경험을 백색 화면, 흐릿한 초점, 흔들리는 카메라로 표현해 관객에게 체감적 불안을 줍니다. - 소설의 무명성을 유지하려 했으나, 영화적 진행을 위해 인물들에게 얼굴과 배우가 부여되면서, 관객은 특정 인물의 서사에 더 몰입하게 됩니다. - 내러티브는 더 직선적이고 사건 중심으로 진행되어, 소설의 철학적 독백과 은유적 서술은 상당 부분 축약됩니다.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

  1. 문체와 리듬 – 소설은 쉼 없이 이어지는 문장으로 혼란과 집단적 무너짐을 독자에게 직접 체험하게 하지만, 영화는 이를 영상적 장치(흐릿한 시선, 흔들림)로 대체합니다.
  2. 익명성과 보편성 – 소설은 인물을 ‘이름 없는 존재’로 제시하여 보편적 은유를 강조하지만, 영화는 줄리안 무어, 마크 러팔로 같은 스타 배우가 등장하면서 캐릭터 중심 드라마에 가까워집니다.
  3. 철학적 깊이 – 소설은 인간성, 권력, 종교, 사회 시스템의 붕괴를 장광설 같은 철학적 문체로 탐구합니다. 영화는 이를 시각적으로 요약하며, 관객에게 더 직접적인 감각을 전달하지만 사색의 깊이는 줄어듭니다.
  4. 주제 구현 – 소설은 끝까지 “눈먼 것은 양심”이라는 상징을 강조합니다. 영화 역시 이를 드러내지만, 더 서사적이고 희망적인 엔딩 톤(실명에서 회복되는 장면)으로 마무리합니다.

공통점 – 인간 사회의 취약성

두 작품 모두 인간 사회가 얼마나 얇은 문명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질서와 규범은 시력이 사라지는 순간 무너지고, 권력과 폭력이 지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존엄과 연대의 가능성 또한 강조됩니다. 특히 의사의 아내는 소설과 영화 모두에서 ‘인류의 마지막 양심’을 상징합니다.

결론 – 은유에서 체험으로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가 독자의 사유와 해석을 요구하는 은유적 텍스트라면,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것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시각적 장치로 변주한 작품입니다. 소설은 더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며, 영화는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충격을 줍니다. 따라서 두 작품은 같은 이야기를 다루지만, 서로 보완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소설은 ‘생각하게 만들고’, 영화는 ‘보게 만들며’, 둘 다 결국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정말 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눈먼 자로 살아가고 있는가?”